휴가 때 읽으면 좋을 책
휴가 때 읽으면 좋을 책
  • 정선옥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 승인 2013.08.0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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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정선옥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새벽에 눈을 떴는 데 세찬 비가 내린다. 밤새 꿈을 꾸었다. 아이들이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아 하루 종일 찾아 헤매던 꿈으로 요즘 정유정의 ‘28’과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연달아 읽어서인 듯하다.

얼마 전 문학동네가 개최한 김영하 낭독회에 다녀왔다. 참여 자격은 예약도서 구입자에 한정했는데 인원이 천명을 넘는다. 콘서트가 아닌 작가 강연회에 이렇게 많은 독자가 모인 적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옥수수와 나’를 통해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도서‘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노인이 무수히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첫 문장에서 오는 강렬함과 사실적 묘사는 책의 전체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초, 중반부는 범인을 쫓거나 스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가다가 ‘순간 멈춤’ 하는 스토리 전개는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더해준다.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 버리려고 했지만, 다행히 꽤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 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 딸내미와 커피숍에 앉아 팥빙수를 먹으며 이 구절을 읽다가 한참을 웃었다.

전직 살인자인 노인이 시 강좌를 듣는 것과 강사에 대해 평을 해 놓은 설정은 무시무시한 내용이지만 유머가 곁들여 있다.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새로운 살인범과의 대결로 자신의 목숨은 잃지만, 딸의 목숨은 지켜 내겠지 하는 평범한 결론을 예상했는데, 굉장한 반전이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딸 은희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저 치매 노인을 가끔 돌봐주었던 사회복지사였다는 것, 주인공 김병수와 피 말리는 신경전을 벌였던 연쇄 살인범 박주태도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은 꽤 오래 정적으로 이어졌다. 딸이었다고 믿었던 은희도 결국 김병수가 죽인 것일까? 어릴 적 술만 마시면 엄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죽이며 살인자의 길을 걷게 된 김병수의 삶은 어려운 가정환경이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그에게 알츠하이머는 순간의 기억조차 잊어버리는 무서운 형벌이 되고, 결국 연쇄살인자라는 과거의 악이 세상에 공개된다.

낭독회에서 사회자로 나온 가수 이적의 반전 있는 결론에 대한 질문에 작가는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인이 일인칭 화자인 지극히 주관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불안정한 정서임을 강조한다.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영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시간, 죽음, 노쇠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두 번씩이나 반복한 반야심경의 구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적절히 묘사된 고급스러운 문체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여름 밤 무더위로 잠이 오지 않을 때, 휴가 때 읽으면 좋을 책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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