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즉시
지금 즉시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08.0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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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늦은 밤. 잠이 오지 않는다. 작은 그림 한장을 들여다본다. 인상파화가로 알려진 차일드 하삼의 ‘비 내리는 자정’. 낮에 일 있어 대전에 갔다가 미국미술 전시회에 들러 사온 그림엽서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거리는 푸른 안개에 몽롱하게 갇혀 있다. 흥건하게 젖은 거리, 길게 누운 가로등 불빛만이 가물거리며 살아 흐르는 길엔 마차 한 대가 뒷모습을 보이며 달려간다. 고요한 자정의 거리, 쓸쓸하면서도 아득한 그리움을 담은 듯하다.

마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실존의 의미를 찾아 고뇌하던 하삼의 의식세계를 보여주듯 마차 안은 어둠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마차의 손님을 상상하다가, 내가 손님이 되어 깊은 심연에 잠긴 채 헤매기도 하다 떠난 친구를 생각한다.

“왜 걸을까?”

홀로 국토를 종단하는 누군가의 외로운 걸음에 힘을 보태려 동행 길에 나섰던 친구가 자신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다. 어두운 빗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베란다에 나가 도시를 바라본다. 자정이 넘은 시간 도시는 그림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다. 희미하게 지워진 사물들 사이 가로등만 선명하게 길을 밝히고 있다. 마치 이정표처럼. 친구는 이정표처럼 흔들리는 삶들을 잡아주던 ‘동기부여’ 강사였다. 건강하다면 ‘지금 즉시’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시작하라던, 그래서 닉네임도 지금 즉시였던 그. 허무하고 기막힌 삶 앞에서 윤동주의 ‘흐르는 길’이 떠오른다.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 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단추를 끼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림(來臨)//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포스트 속에다 내일에 붙이는 희망의 사연을 적어 넣은 윤동주처럼 꿋꿋하고 신념 강했던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은 벗들은 말을 아꼈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고단한 현실에서도 웃음으로, 목소리로 희망을 그리던 친구. 뜨겁게 살았던 친구였기에 갑작스런 이별은 모두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었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생각한다. ‘지금 즉시’

친구를 보내며 살아낼 시간을 계획한다는 삶이 잔인하고 아프다. 하지만, 친구를 가슴에 묻고 남은 우리는 그리 내일을 기약한다. 친구가 남긴 희망메시지들이,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들이 뜻 깊은 의미가 되어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도한다. 친구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도 하기에.

이제 긴 장마가 끝났다는 일기예보다. 작열하는 8월의 태양은 긴 장마로 상처 입은 자리마다 새살을 돋우고 치유하며 삶을 살찌우리라.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들을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자아 찾기든 생소하고 두려운 낯선 길이든…. 그리고 “지금 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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