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있다
피어있다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3.07.2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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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초봄부터 쉼 없이 피어나는 꽃들이다. 발자국 옮겨 걷다 보면 어느 집이고 각기 다른 이름의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울도 담도 없이 사는 곳이라 집집마다 지천인 꽃구경은 공짜다.

고운색깔과 향기에 푹 빠져 한 계절을 보냈다. 아름다움은 마음을 열게 한다. 요즘엔 원추리 꽃이 좋다. 잊을 만하면 수줍은 미소로 아는 척하는 민들레꽃도 반갑고 달맞이꽃과 연분홍메꽃의 자태도 아련하다. 아침나절 들꽃에 맺힌 이슬위로 햇살이 반짝이면 그 앞에 서서 나는 꼭꼭 여몄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만다. 요즘은 은은한 향기로 고요하게 피어 있는 들꽃이 편하다.

들꽃향기가 나는 초등학교 적 친구가 있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 몸은 꽃잎진지 오래인데 늘 피어있다. 예쁘지도 않다. 키는 평균치보다 작고 날씬한 것도 아니다. 얼굴은 동그랗고 몸도 둥글다. 게다가 피부도 까무잡잡하다. 얼마 전까지는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다. 겉모습을 보면 무언가 한 가지라도 눈에 들어와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없다. 그녀도 인정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향기가 있다.

친구의 남편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한지가 삼년쯤 되었다. 삼년동안 외출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집안의 대소사도 아내에게 맡기고 하루에 두 갑씩 태우는 담배는 누운 자리에서 그대로 태운단다. 집안의 벽지도 노랗게 찌들고 방바닥과 이브자리마저 담뱃재에 구멍이 숭숭 이란다.

그뿐이 아니다. 시부모님과 자식일도 모두 친구의 몫이다. 모르쇠로 일관한단다. 퇴직 전에 아무리 성실하게 가정을 건사한 남자라도 그쯤 되면 여자는 속이 터져 화병이라도 나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를 만나든 환하게 웃는다. 지나는 사람마다 가리지 않고 미소를 지어주는 들꽃 같은 소박한 모습이다. 집안 사정을 잘하는 친지나 친구들이 그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할 때마다 그녀는 말한다.

누구든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편안하게 해주다 보면 본인도 편안해져 그냥 웃음이 나온단다. 생의 고통을 혹독히 치르고도 가까운 사람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다 스스로 상처받는 나는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고 편안해 질까. 아득하다.

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다.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그녀의 남편이 회사경비로 취직을 했단다. 더 반가운 소식은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친구가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 놓는다. 결혼 이후로 견뎌야 했던 생의 환멸과 권태가 그녀에게도 있었으나 남편에게도 무언가 생각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는 성경구절처럼 연민의 마음으로 끌어안았던 거다. 인내의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야 고요해진 친구가 존경스러웠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다. 산책을 나섰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들꽃들은 어젯밤 비바람에 옆으로 누웠다 다시 일어나는 중이다. 한철에 피었다지는 꽃 같은 인생이다. 모진 바람에 빨리 지는 것이 집안의 꽃이고 오래 피어 있는 꽃은 들꽃이다. 연분홍 메꽃위로 화사하게 웃는 친구의 얼굴이 겹쳐진다.

※ 필자 소개

한국문인협회원, 청주문인협회 사무국장, 푸른솔문학회, 여백회 부회장,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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