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짜기 과정 검토해야 판을 뒤집을 수 있다
판짜기 과정 검토해야 판을 뒤집을 수 있다
  •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7.2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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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불과 5년 전, 우리의 뇌리에 스마트 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휴대폰과 개인용 컴퓨터의 기능을 결합한 스마트폰은 다양한 앱을 탑재하여 이동 중에도 통신과 각종 사무, 오락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스마트 폰 없던 시절에도 살았고, 마찬가지로 20년 전에는 휴대폰 없이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엄청나게 불편하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의존도가 심해서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이전에는 없이도 살았지만 상품이 개발됨으로써 생활필수품이 된 것이다.

이렇듯 이제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대가 되었다. 칫솔이나 치약과 같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사람들이 필요로 하게 만들어야 돈을 버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곧 요즘의 기업은 기존의 시장에 적응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돈을 번다.

새 시장을 만드는 건 새로운 판을 짜는 것과 같다. 새 판에 들어가면 그 판의 논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시장은 일단 만들어지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개인에 따라 상품의 노예가 되기 싫어서 스마트폰 없이 옛날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다. 한 번 형성된 시장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 시장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곧 먼저 판을 짜고 그 판에 사람들을 적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판이 한 번 짜이면 그 판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판을 짜고, 문제를 나중에 해결하는 방식을 택한다. 속된 표현으로, 일단 저지르면 결국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심산이다.

누군가 판을 짜고 반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하고자 할 때, 이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판을 짜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판을 짜고 난 후에 싸움을 하는 방법이다.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번 짜인 판이 뒤집어지기는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벨트 수정안을 놓고 지역이 시끄럽다. 과학벨트 사업은 지난 정권에 부지가 선정되었고, 수백 명의 전문가들이 3년에 걸쳐 종합계획과 기본계획, 시행계획을 차례로 마련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특별법으로 통과된, 이 정권의 충청도민들에 대한 대표 공약이었다. 그런데 부지매입비 부담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전시와 미래창조과학부가 사업의 근간을 흔드는 수정안에 대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한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대전시와 손잡고 과학벨트 새판 짜기에 돌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지역의 관계기관과 의회,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연일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며, 지역의 정가는 양분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일방적으로 새판을 제시하고, 지역사회는 이에 저항하는 양상이다.

이런 싸움의 방식으로는 수정안 폐기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학벨트 수정안이 마련되기까지의 판짜기 과정을 냉정하게 되짚어 볼 때이다. 지역의 공감대 없는 양해각서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부지가 명시되어 있는 특별법에 저촉되는 점은 없는지를 물어 판짜기를 원천 무효화해야 수정안 폐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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