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하는 이야기
몸이 하는 이야기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3.07.2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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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언제부터인지 책을 읽으려면 돋보기를 먼저 찾아야 했다.

돋보기란 것이 늘 책 옆에 붙어 가지런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정리정돈에 소질이 있어 늘 두던 곳에 두는 것도 아닌지라 여간 성가시지가 않았다.

요즘 나에게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곧 돋보기도 동시에 찾아야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겉으로는 아직 젊은 나이라고 우겨보지만 이미 내재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웃기지 말라며 노안이 찾아온 걸 인정해야 된다고 아우성이다.

어디 노쇠 되는 부분이 눈뿐이겠는가. 일을 마치고 3층 계단을 올라 집까지 돌아오려면 1층 첫 계단부터 두 다리가 투정이다.

왜 그 흔한 승강기도 없는 불편한 집에 사냐고, 3층까지 오르는 것이 백두산 정상 정복이라도 되는 듯 거실에 들어와 두 다리를 뻗고 앉을 때까지 힘들다는 위세가 대단해서 목불인견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다리가 하는 행태가 아니꼬워도 살살 주무르고 어르고 달래야 내일이 편안하니 꼼짝없이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다.

또 두 팔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나를 힘들게 한다.

예전에는 아무리 많이 부려 먹어도 힘들다 내색 한번 없더니 눈과 다리에 보조라도 맞추지 않으면 벼락이라도 내리칠까 걱정인지 덩달아 이곳저곳 쑤시고 결린다고 아우성이다. 눈이나 팔 다리나 내가 주인인데 맘대로 부려 먹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여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동안 작은 체구지만 건강은 타고났다고 과신하며 내 몸에 저지른 만행이 있으니 큰소리 칠 입장도 못된다.

살아오는 내내 성질은 왜 그리 급한지 나 아니면 일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먼저 나서서 일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또 힘자랑은 얼마나 했는지 무거운 것 마다 않고 들어 올리고 내린 게 얼마인가. 잠자는 시간 빼고는 두 다리를 편하게 쉬게 해준 적도 없으니 여기 저기 결리고 쑤신다고 아우성을 친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다만 요령 피우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 이리 되었노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조금씩 약해지기도 하고 신체 기능이 저하되는 게 당연한 섭리다. 그러니 노안이 왔다고 그리 서러워할 일도 아니며 팔다리가 결리고 쑤신다고 불평할 일도 아닌 것이다. 다만 책 읽을 때 돋보기를 껴야 좀 더 편안해지니 돋보기를 찾는 수고로움을 즐기면 될 터이고, 예전보다 무거운 걸 들지 못한다면 좀 더 가볍게 나눠들면 그뿐이다. 또 행동이 굼뜨면 어떠랴. 느리고 꼼꼼하게 하면 더 이득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늙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이 들어간다는 일이 그리 서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젊은 나이에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기도 하고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관조할 수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은혜로운 혜택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부터 나도 늙어간다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몸이 하는 이야기에 조근조근 대답을 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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