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향기
내가 좋아하는 향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7.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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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5월이 되면 기다려지는 향기가 있다. 등나무 꽃냄새다. 보라색 꽃빛깔도 좋지만, 주렁주렁 달리는 꽃모양도 여간 풍성한 것이 아니다. 부케라고 부르던가, 한 송이만으로도 결혼식에서 신부가 드는 한 다발 꽃이 될 만하다. 가벼워서 던지면 잘 날아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때쯤이면 등나무 잎도 제법 무성해지지만 사이사이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꽃 봉우리들이 신기하기만하다. 한주먹만 하던 것이 어느덧 팔뚝만해진다. 그러면서 점차 연보랏빛 꽃송이를 드러낸다. 그다지 진하지 않은 보라색이 참으로 겸손하다.

시절도 좋아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이 등나무 그늘 밑으로 꼬이게 되는데, 바람 불 때마다 몰려오는 등나무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평온하게 만든다. 다만 교정에서는 남녀학생이 짝을 짓고 앉아있을 때가 많아 오래 앉아있으면 눈치가 좀 보인다.

글쎄 식욕일까? 포도송이 같은 등나무 꽃 밑에 앉아있으면 마음도 풍요롭다. 언젠가는 따먹어 볼 일이다. 향에 취해 입맛을 잃는 내가 의아하다.

보통은 등나무가 올라가도록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파고라’라고 부르는데, 정확히는 ‘퍼골라’(pergola: 페르골라)가 맞다. 우리말로는 ‘시렁’이라고 한다. 그런데 등나무가 여간 힘이 좋은 것이 아니다. 웬만한 구조물도 넝쿨이 감싸버리면 금세 비틀린다. 그래서 시렁을 만들 때는 지지대 공사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왕이면 높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두 길은 돼야 여름의 시원함을 파고라가 남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6월이 되면 또 기다려지는 향기가 있다. 5월이 가고 6월도 막바지에 이르면 자귀나무에서 분홍색 꽃이 피기 시작해서 7월초까지는 자태를 뽐낸다. 잎이 참빗처럼 생겨 밤에는 오므라드는 나뭇잎을 가진 나무다. 어렸을 때는 그 나뭇잎으로 하나씩 떼어가면서 놀았던 것이 기억난다. 무슨 놀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남는 숫자로 승패를 나누었던 것 같다.

자귀나무를 중국에서는 봉황수라고 부른다. 꽃이 마치 봉황의 꼬리깃털 같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남쪽 나라의 더운 여름에 그 꽃이 하늘하늘 날리면, 나는 너무도 졸렸다. 2층 강의실 창밖으로 꽃은 만발한데 강의는 들리지 않고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혼수상태로 빠지던 그해 여름을 기억한다. 야속한 눈꺼풀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대비되는 나의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등나무 향기를 좋아하는 것은 꽃이면서도 지나치게 짙지 않은 향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상쾌하다. 내가 자귀나무 향기를 좋아하는 까닭도 비슷하다. 붉은 꽃이면서도 향기가 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달콤함을 잃지는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떨까? ‘등나무 향기는 남성적이면서도 스포티하고, 자귀나무 향기는 여성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에로틱하지 않다.’ 나는 그런 향기가 좋다.-공교롭게도 둘 다 꼬투리에 씨앗을 담는 콩과식물이다.

미국에서는 포치(Porch)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베란다(Veranda)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철학사에서 포치(the Porch)라고 하면 아테네에서 제논이 학생을 가르치던 복도를 뜻하기도 하고 스토아 철학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언제가 나도 ‘시렁학파’를 이루고 싶다. 그것이 ‘꿍시렁’이 되어도 말이다. 그러다보면 ‘자귀’(自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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