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독립운동가 생가로 떠나는 호국·안보여행
충청권 독립운동가 생가로 떠나는 호국·안보여행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06.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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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숨결 오롯이 … 나라사랑 깨닫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시대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단재신채호 조선사총론에서)

1986년 8월1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위인 49인의 시비, 어록비 중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이다. 청소년들의 역사관과 애국심을 걱정하는 기성세대들이 많다. 청소년들에게 “6·25를 아느냐”고 질문했더니 “성취도 평가 보는 날”이라는 답변이 나왔다는 얘기가 한참동안 회자된 것도 그 이유다. 자녀들에게 호국·안보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라면 지역에 위치한 애국지사 생가를 방문해 보면 어떨까

◇ 항일운동의 큰별이 태어난 역사의 땅 '홍성'

충남 홍성군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친 홍성 출신의 대표적 인물로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김좌진 장군(1889∼1930)은 1911년과 1915년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투옥됐다. 그는 1917년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펼쳤다. 특히 청산리대첩은 일제강점기에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전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록에 따르면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홍성에는 기념물 제76호인 김좌진 생가(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번지 )가 있다.

김좌진 장군 생가 앞길을 따라 결성농요농사박물관 방면으로 내려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의 생가(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가 있다. 이곳에는 만해의 문학과 철학을 반영하는 유물 60여 점이 전시된 만해문학체험관이 있다. 만해는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고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후 불교의 대중화, 독립사상 고취, 문학 활동을 펼치다가 1944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심우장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했다는 일화가 있다.

◇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생가(대전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생가 터는 대전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다. 생가 입구에 큰 비석이 세워져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원두막과 오래된 초가집 한 채가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곳에서 아버지가 죽은 8살 때까지 살았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8년 대만으로 가던 중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뤼순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21일 5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단재사당(충북 기념물 90호)은 단재 신채호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사당으로 선생의 묘소 바로 앞에 있다. 영정은 1981년에 한광일이 그린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의 설채 견본이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절에 살던 옛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정에는 한용운, 오세창, 신백우 등이 세운 묘표와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생가(진천군 진천읍 이상설 안길 10)

진천에 있는 이상설 선생(1870∼1917) 생가는 지방기념물 제77호로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 협동회를 조직해 민족 운동을 했다. 1906년 4월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했다. 선생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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