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기념일에 통일을 생각한다
6·10항쟁 기념일에 통일을 생각한다
  • 문종극 기자
  • 승인 2013.06.09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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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문종극 <편집국장>

1987년 6월 항쟁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이뤄낸 승리였다. 그 승리는 또 다른 승리를 위한 밑거름이 됐다. 민주화 운동이 남북 관계 개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국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불태웠다.

성장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경제 정의를 실천하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성 중심의 문화를 타도하려는 자주적인 여성 운동도 활발해지는 등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같은 민주화의 진화는 남북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6월 항쟁 1주년인 1988년 6월 10일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였다. ‘남북 청년 학생 회담 성사 및 공동 올림픽 쟁취’를 위한 집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대회를 마친 학생 상당수가 판문점을 향해 길을 나섰으나 경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날 행사는 남북 관계를 개선하자는 국민여론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로인해 화해 협력과 평화 통일 추진이라는 국민 여론이 정부 정책에 반영돼 민족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1988년에는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규정하고, 교류 협력을 추진하자는 7·7 선언이 나왔고 이듬해에는 남북이 협력, 공동 번영을 위해 노력하면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일하자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통일 방안이 발표되기도 했다.

1990년에는 과거와 같은 비밀 협상이 아니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 정부 간의 대화가 시작됐다.

남북 총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협상을 계속했고, 1991년 마침내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는 내용의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도 했다.

정부는 북한과의 교류 협력을 내세웠지만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한 국가 보안법과 충돌하는 것이어서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을 엄격히 제한하면서도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국민적 희망을 보듬는 시대적 흐름을 계속 이어갔다.

이렇게 보면 민주화 운동으로만 여겨진 6월항쟁이 통일을 향한 디딤돌 역할도 한 것이다.

‘6·10 민주항쟁’ 26주년이 되는 오늘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갖고 통일을 논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극도로 경색돼 있던 남북 관계가 어제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을 시작으로 풀리게 됐다. 실로 6년만에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리게 된다. 오는 12일 공동 개최하는 것으로 어제 실무접촉에서 최종 합의됐다.

남북 장관급 회담은 2000년 7월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매년 2~4차례씩 모두 21차례 열렸다. 그러나 지난 2007년 5월 서울 그랜드호텔에서 제21차 장관급 회담이 열린 것을 끝으로 지금껏 중단됐었다.

장관급 회담이 열리게 되면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그동안 진행돼 오다 중단된 문제 등이 회담 테이블에 올려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갑작스럽지만 이 같은 희소식은 북한의 달라진 태도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우리는 긍정적으로 반길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북한이 당국 간 남북대화 재개를 수용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현안을 해결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는가 하면 정치권의 여야도 크게 환영했다. 그 만큼 그동안 북한의 몽니가 우리를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의 달라진 모습이 내친김에 통일까지 죽 그랬으면 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폭넓게 서로의 문제를 풀어갔으면 한다. 통일의 디딤돌이 된 6·10항쟁 26주년인 오늘 그날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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