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꽃
사람보다 꽃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6.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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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꽃과 미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한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외양의 모습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를 따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당연시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여성 인권이니 여성 비하니 하며 시비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말(麗末)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꽃과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는 장면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 절화행(折花行)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알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미인이 모란꽃 꺾어 창앞을 지나간다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웃음을 머금고 박달나무 신랑에게 물었다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꽃이 더 예뻐요, 제가 더 예뻐요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신랑이 일부러 장난치면서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꽃가지가 더 예쁘다고 말하는구나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신부는 꽃이 더 낫다는 데 시기하여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꽃 가지를 밟아 짓뭉개고 말했다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꽃이 저보다 예쁘다면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오늘 밤은 꽃과 같이 주무시지요라고 하였다

※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부귀(富貴)만한 것이 또 있을까?

모란(牡丹) 그 화사함과 풍성함으로 인해 부귀(富貴)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도 서운한 구석이 있다. 꽃이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돈은 많고 보고(富), 벼슬은 높고 보고(貴), 생김은 예쁘고 봐야(美)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영원한 로망인데,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모란(牡丹)이다.

이런 모란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당(唐) 현종(玄宗)의 비(妃)였던 양귀비(楊�~�)였다. 여염(閭閻)의 여인네들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말 그대로이다.

그런데 여기 감히 모란(牡丹)에 대드는 여인이 있다. 무모한 이 여인의 힘은 바로 질투(嫉妬)이다.

모란꽃 위를 구르는 이슬은 진주알 그 자체이다. 이슬이 천하절색인 모란 위에 내린 덕이다. 그런데 겁 없는 여인이 이것을 꺾어서는 평소에 사모하던 남자의 창 앞을 일부러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가장 자신 있는 웃음을 띠면서 그 남자에게 무언가를 묻는데, 묻는 내용이 걸작이다.

진주알 같은 이슬이 달린 모란꽃과 자신 중 누가 예쁘냐고 진지하게 물은 것이다.

이럴 때 남자는 보통 꽃보다 여자가 예쁘다고 말해야 하는데, 시 속의 남자는 여자를 놀려줄 목적으로 일부러 꽃이 더 예쁘다고 대답하였다.

이 장면에서 여자도 결코 숙맥은 아니었다. 짐짓 꽃에 질투를 느끼는 듯이 꽃을 내동댕이치면서 꽃이 더 예쁘면 오늘 저녁은 꽃과 함께 자라고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농을 농으로 받을 줄 아는 여자의 재치가 참으로 매력적이다.

꽃과 여자를 비유하는 것에서 어떤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도 격조 낮은 일이다. 꽃이 자신보다 예쁘다고 질투하는 여자는 어리석지만 질투하는 척하는 여자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매력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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