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06.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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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은 나를 위한 시간이다. 혼자 놀기를 즐긴다.

밀린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때론 보고 싶은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재미는 삶의 에너지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를 듣는다.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집을 나서 도서관까지 걷는 시간이 새롭다.

어쩌다 바람 불고 가끔 이슬비라도 뿌리는 날은 선선하여 걷기에 참 좋다. 직선인 큰길은 지루하고 소란스럽다. 부러 큰 길을 벗어나 오르막을 지나면 동네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좁은 길이 나온다. 기역자로 구부러지기도 하고 낮은 오르막이 반복되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고만고만한 텃밭들을 끼고 이어진 기와집들. 올망졸망 자라는 푸성귀들은 각기 다른 주인의 품성을 보여주는 듯 정겹고, 울타리 너머 붉은 장미꽃 넝쿨 틈새로 새어나오는 자잘한 생활소음들로 골목 안은 생기가 돈다. 다양한 삶이 이웃해 있는 골목, 옅은 회색을 띤 보도블록이 칙칙하고 엉성하게 깔린 좁다란 길엔 햇빛과 바람, 빗물을 머금으며 다양한 인연을 품고 흘러온 시간의 흔적이 배어있다.

잠깐 지나는 비에도 오랜 시간 발길 스쳐 거칠어진 옛 블록은 금새 어두운 빛으로 젖어들듯 오래된 옛 풍경을 간직한 골목은 잠시 지나는 사이에도 많은 상념을 일으키며 먼 기억의 탯줄까지 더듬게 만든다.

골목에서 비석치기하며 놀던 어린 날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아팠던 기억과 행복했던 기억들이 새블록과 낡은 블록이 만들어내는 무늬처럼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잊고 있었던 고마운 사람들, 그리운 인연들이 떠오르며 많은 이들의 응원으로 현재의 자리에 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또 내일을 열심히 그리고 올바르게 걸어가는 힘이 된다.

누구나 그렇듯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자유로운 삶이 목말랐다. 하지만 삶이란 끊임없이 다가오는 물음들에 답을 구하는 과정임을 자각한 뒤로 모범답안이 없음에 좌절하며 고비가 닥칠 때마다 ‘내가 왜?’ ‘~때문에’라며 세상을 향해 불만을 쏟아내곤 했다.

요즘은 신탁에 의해 정해진 자신의 운명이라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저항하는 호전적인 그리스고전 속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생각을 한다. 질문의 화살을 밖이 아닌 나를 향해 던지는 연습이다. 고통스럽고 아프고 가혹한 운명 앞에 놓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 살아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주일 중 하루, 삶을 되돌아보며 걷는 골목길에는 평범하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낮은 것으로부터 오는 소소한 행복을 일깨워주는 풍경들이 있어 좋다.

골목길 모퉁이 화단엔 붓꽃이 한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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