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입는 동물
옷 입는 동물
  • 충청타임즈
  • 승인 2013.05.30 2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개미나 벌도 사회적이기에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람도 감정에 휘둘릴때가 많아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도구적 동물’이라고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이용하여 견과류를 까먹는 동물도 있으니 도구가 인류만의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태풍이 와도 떨어지지 않는 까치집을 보면 우리만 집을 지을 줄 아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최근의 연구로는 원숭이들도 거짓말을 한다니 우리만 ‘거짓말하는 동물’은 아닌 것 같다. 천적이 나타났다면서 소리치고는 먹을 것을 독차지 한단다.

그런데 옷만큼은 인류의 독보적인 진화의 산물인 것 같다. 사람 말고는 옷 입는 동물은 없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정의해보자. ‘사람은 옷 입는 동물’이라고. ‘목욕탕을 같이 가야 친해진다’는 말은 원초적 환경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벌거벗고 보면 똑같은 짐승인데 잘 난 척 해봤자 라는 것이다. 또한, 한 때 유행했던 가사처럼 ‘올 때는 벌거벗고 왔지만 갈 때는 (수의라도) 한 벌이라도 걸치고 간다’는 것은, 올 때는 짐승으로 와서 갈 때는 사람으로 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옷은 인류만의 창작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옷을 입고 안 입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군부독재시절에 고문하기 전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옷을 벗기는 일이었다. 옷을 벗김으로써 너는 사람이 아니라고 인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은 없다.

대학시절 수영장에서 발가벗은 고등학생을 야단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열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주장은 그랬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전에 옷부터 입혀놓고 말하라’고. 다행히 그 사람도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는지 옷을 입고 오라고 해서 큰 다툼은 나지 않았다. 자신은 옷을 입고 발가벗은 학생을 야단친다는 것이 내 눈에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옷을 막 입은 상태였다. 만일 내가 옷을 벗었다면 그 사람이 내말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거 옷은 국가를 뜻하고 신분을 뜻했다. 그러나 청바지가 유행하면서 평등의 이념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광부의 옷이 인류평등의 상징이 된 것이다. 히피는 그 중심에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인류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젊은 학생들은 브랜드에 따라 청바지에도 계급이 있다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중·일을 비교하면 막 입는 사람은 중국사람, 차려 입는 사람은 일본사람, 그 중간쯤이 우리다. 중국인을 옷을 보고 평가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허름한 차림의 재벌이나 정치인도 많다. 옷만 본다면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중국인이다. 일본인은 모두 깨끗이 입어 신분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의 학회를 갈 때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이 넥타이다. 풀어헤친 모습이 일본인에게는 예의 없음으로 비치기 쉽다. 한국인은 옷으로 사람을 단정한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병무청에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갔더니 반발로 응대하더니 다음날 다른 일 때문에 양복을 입고 갔더니 선생님이라고 불렸던 기억이 난다. 똑같은 사람을 놓고 ‘반말에서 선생님까지’라니 우리 복식문화의 잔인함이다.

미국인들이 옷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무시했다가는 실수한다. 아직도 재킷을 걸치게 하는 모임이나 식당도 많다. 다만, 하와이에서는 만찬자리에 앞서 꽃무늬남방(Hawaiian attire)도 정장에 속한다고 공표한다. 옷, 사람의 제2의 천성이 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