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909년 증명사진 사용 시작 최초의 여자 사진사는 이홍경
<18> 1909년 증명사진 사용 시작 최초의 여자 사진사는 이홍경
  • 충청타임즈
  • 승인 2013.05.3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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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사진가의 한국 사진史
한국 초기의 사진관. 연대 미상.
주요 사진사 - 1631~1945년

정인영 <사진가>

1631년 사진 원리 최초 전래
1916년 범죄자 첫 기록사진

1925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신문사진 첫 취재방해 사건

1929년 사진사 최초 개인전

한국 사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근대 이후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유입된 사진기는 당시 문화적 충격과 함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선도했다.

그동안 한국 사진의 역사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변화상까지 살펴보았다.

연재를 마치며 한국 사진의 역사를 연도별로 정리한다.  

1631년 진하사로 중국에 간 정두원 일행이 연경에서 선교사에게 기증 받아 가져온 ‘원경설’에 카메라 옵스쿠라의 기록이 들어 있어 우리나라에 사진의 원리가 최초로 전래됐다.

1871년 5월 31일,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했을 당시 종군사진가 펠리스비토가 미국 함대를 방문한 조선인 문정관 요새지, 포로, 전투장면, 미군함대와 해병을 촬영했다. 미 해병이 해외 전투에 종군사진가를 파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여성사진사 이홍경이 운영하던 경성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1926.

1909년 2월 5일-세무주사 시험 때 면접 후 응시자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했다. 우리나라에서 증명사진 사용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

1916년 6월 16일-서울 서대문감옥에서 범죄자들의 사진을 찍어 처음 기록사진으로 남겼다.

1919년 2월-고종이 승하했다. 매일신보가 고종의 승하 무렵부터 장례식까지 많은 사진을 지면에 실어 보도했다.

1919년 3월 1일-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7일의 서울 만세시위현장 사진이 일본 아사히신문 3월 10일자에 게재됐다. 정환범이 스코필드가 찍은 3·1운동 관련 사진을 구두 밑창에 숨겨 중국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25년 4월 20일-일본 경찰이 서울 종로에서 열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취재하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사진기자를 폭행하면서 카메라를 파손하고 필름도 압수했다. 신문사상 최초의 신문사진 취재방해 사건이었다.

1926년 5월 18일-조선일보가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라는 기획기사에 여성사진사 이홍경을 소개했으며, 서울 근화여고가 처음으로 여자사진과를 개설했다.

1930년 8월 26일-황해도 개성 남본정천임 사진관에서 김금옥과 장명옥을 모델로 한 나체사진을 촬영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제지당했다.

1931년 4월 20일-매일신보가 인천관측소 망원사진기로 찍은 일식사진을 지면에 게재했다.

1931년 9월-제2회 정해창 예술사진 개인전람회가 서울 낙랑다방에서 열려 캐비닛판 40점이 소개됐다. 1929년 3월 29일 서울 광화문빌딩에서 우리나라 사진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제1회 개인전 이후 두번째였다.

1931년 10월 23~25일-서순삼 제1회 예술사진전람회가 조선일보 평양지국 주최로 조선일보 평양지국 2층에서 열려 작품 80점이 전시됐다.

1932년 9월-대구에 살고 있는 류진용이 7년간 연구 끝에 종이나 나무, 포목에도 사진을 박을 수 있는 사진감응액을 발명했다.

1933년 3월 25일-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이 중심이 되어 남조선사진협회를 대전 춘일정 남성사진관에서 조직했다.

1933년 10월-평양에서 현일영이 사진전람회를 개최하고 전시작품 20점을 보여줬다.
1919년 3월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군중. 이 사진은 흔히 3·1운동 관련 사진으로서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 모습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 일본 신문에서는 '고종의 운구행렬을 기다리는 군중들'로 설명되어 있다.

1935년-임응식이 강릉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진가들로 강릉사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된 후 활발한 사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임응식은 강릉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1937년 5월 13일-강릉사우회 제1회 사진전이 개최됐다.

1939년 1월 8일-체신국이 서울과 도쿄, 만주의 신경(新京)을 잇는 통신망을 정비하여 유선으로 전송사진 송수신을 개시했다.

1940년-사진기 공정가가 3할 인하되어 고시됐다. 상공성에서 열린 가격형성 중앙회 잡품부회에서 라이카 HB, 헥토르f3.5 포컬플레인 셔터부착 신품을 490원, 라이카 엘마3.5를 250원, 세넷타 신형인 넷타 f4.5 클리오셔터부착을 160원, 세미이콘타노바 f3.5R 콘퍼셔터를 150원으로 정했다.
함남 덕원 남자 9명의 체격 측정 기록사진. 상반신을 모두 벗고 찍었다. 1911.

1942년 6월 22일-전조선영업사진가들이 서울 부미관 중강당에 모여 ‘사진으로 방첩, 사진으로 보국하자’는 취지 아래 조선사진회를 결성했다.

1944년 3월-일제총독부가 소득세법외 법률을 개정하고 16조에 사진용품, 카메라 확대기, 영사기 및 부속품과 함께 현상 인화용기, 사진용 건판필름, 감광지 등에 대해 물품세를 부과했다.

1945년 8월 15일-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 경향각지에서 해방축하시위가 열렸고 사진은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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