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산에 밤이 드니
봄 산에 밤이 드니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5.2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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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시기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봄 산은 형형색색의 꽃과 싱그러운 초록이 어우러져 보통은 화창한 날과 잘 어우러지고, 실제로 사람들이 봄을 즐기는 시각은 대부분 낮이다. 날씨로 보아도 봄은 밤이 되면 온도가 상당히 낮아지므로 사람이 머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늦봄의 경우는 여름이나 마찬가지인 날들도 있어서 달 밝은 산 속을 거닐만한데, 이 같은 밤 산행은 낮과는 다른 묘미(妙味)가 있다. 당(唐)의 시인 우량사(于良史)는 늦봄의 진풍경(珍風景)을 만끽(滿喫)한 행운아였다.

◈ 춘산야월(春山夜月)

春山多勝事(춘산다승사) : 봄 산에는 좋은 일도 많아

賞玩夜忘歸(상완야망귀) : 느끼고 즐김에 밤 되도록 돌아가길 잊었네

국水月在手(국수월재수) : 물을 움켜지니 달이 손에 있고

弄花香滿衣(농화향만의) : 꽃을 가지고 노니 꽃향기가 옷에 가득하네

興來無遠近(흥내무원근) : 흥이 나서 왔더니 멀고 가까움 없는데

欲去惜芳菲(욕거석방비) : 떠나려 하니 향기로운 풀 아쉬워라

南望鐘鳴處(남망종명처) : 남쪽으로 종소리 나는 곳 멀리 바라보니

樓臺深翠微(누대심취미) : 누대엔 짙은 비취 빛깔 희미하게 보이네

※ 시인이 봄 산 구경에 나선 것은 여느 사람처럼 낮이었다. 그러나 낮만으로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하였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빼어난 볼거리(勝事)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각양각색의 꽃이며, 향기를 품은 풀이며, 신록의 잎으로 단장한 나무며,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 심지어 푸른 하늘과 실구름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해가 졌다. 돌아가길 잊은 것이다. 예기친 않았지만 산속에서 밤을 맞은 덕분에 시인은 봄의 색다른 향연을 만끽한다. 산 속 봄밤의 경관에 넋을 뺏긴 시인은 개구쟁이가 되었다. 물을 두 손으로 움켜 쥔 것은 물속에 비친 달을 따기 위함이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산속 봄밤의 밝고 맑은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다. 물속의 달로 장난을 치던 시인의 손은 꽃으로 옮겨진다.

이 꽃 저 꽃을 어루만지다보니, 자연스레 꽃이 옷깃에 닿고, 꽃의 향기가 옷에 밴다. 얼마나 꽃을 가지고 놀았으면 꽃향기가 옷 전체에 뱄을까(香滿衣)? 시각(視覺)의 제한이 있는 밤에 화사한 꽃의 모습을 후각(嗅覺)을 빌어 묘사한 시인의 감각이 탁월하다.

시인에게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다(無遠近). 멀고 가깝건 간에 흥(興)이 나서 온 것이다. 올 때는 그러하였지만 막상 갈 때는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남은 흥(餘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려 하니(欲去) 꽃향기가 눈에 밟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 속의 봄밤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남쪽 어디선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그곳으로 눈길이 가는데, 누대(樓臺)가 한 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곳마저 늦봄의 짙은 녹음(綠陰)으로 둘러싸여 있다. 봄을 떠나도 또 다른 봄이 기다리는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일상에 찌든 사람들은 가끔 일탈(逸脫)을 꿈꾸고 그것을 감행하곤 한다. 봄과 여름이 겹치는 오월 하순에는 산속을 헤매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일탈(逸脫)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에 비친 달과 꽃향기가 있고 여기에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더해지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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