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지는 소망
작아지는 소망
  • 오미경 <동화작가>
  • 승인 2013.05.1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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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오미경 <동화작가>

친정어머니랑 시어머니는 사이가 좋으시다. 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님은 푸성귀는 물론 콩이며 감자, 고구마 등을 수확하면 드셔보시라며 꼭 챙겨 친정에 보내주시고, 친정어머님은 가끔 옷가지를 사드리는 것으로 보답한다. 우리는 혼자되신 두 분을 함께 모시고 가끔 식사를 한다.

작년 이맘때, 두 분을 모시고 식사를 했다. 청주에 사시는 친정어머니를 먼저 모시러 갔더니, 옷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흰 모시 저고리에 연노랑 모시 치마를 정갈하게 입으신 모습은 한 마리 나비처럼 고우셨다. 풀을 먹여 빳빳한 모시옷에서는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친정어머니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 친정어머니는 조근조근 말씀을 잘 하셔서 두 분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별 말씀 없이 묵묵히 밥만 드시는 것이었다.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며 시어머님이 참깨를 드려도 민망할 정도로 무덤덤하니 받았다. 조그만 것에도 감동하고 고맙단 인사를 몇 번씩 하는데 이상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일들을 짚어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둘 수상스러워졌다. 자식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말 수가 많이 줄었고,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시어머님이 보내주시는 농산물들을 덤덤히 받으셨다. 형제들한테 연락해 엄마의 이상 징후를 이야기하니, 모두 조금씩 느꼈다 했다.

곧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의사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치매 초기라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약을 먹으면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좋아지는 경우가 70~80퍼센트라는 말에, 곧장 병원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병원을 다녀온 뒤로 나날이 상태가 안 좋아졌다. 우리 형제들은 놀라기를 반복하며 믿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친정어머니는 자식 사랑이 유별난 분이다.

하루는 친정에 간 언니가 내게 전화를 걸어 점점 나빠지는 엄마의 상태를 전해주었다.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져 있는데 수화기에서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엄마 괜찮으니까 걱정 마. 엄마, 괜찮어. 날이 더워서 그려.”

둘째 딸에게 전화 거는 거라는 걸 눈치 챈 엄마가 전화기를 뺏어든 것이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게 바로 우리 엄마였다.

늘 당신 힘든 것보다 자식 마음 쓸까봐 걱정하는 분! 전화 받고 걱정할 딸이 안쓰러운 마음에 새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 우리 엄마, 아직 괜찮아!’ 라는 생각이 들며, 무거웠던 마음이 일순간 가벼워졌다.

전엔 바쁜데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엄마 전화가 성가시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엄마한테서 전화가 오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철에 맞게 옷을 입기만 해도 고맙고, 때맞춰 식사를 하시기만 해도 고맙다. 지나가는 말로 서울 간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잘 다녀왔냐고 물어주는 날엔 눈물 나게 고맙다. 앞으로는 날 알아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지 모른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제대로 하시는 부모님을 아기처럼 안아줄 일이다. 오늘 보장되었다고 내일도 보장되리라는 법이 없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아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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