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일제 무자비한 탄압 속 예술사진 발달 '혼신의 열정'
<16> 일제 무자비한 탄압 속 예술사진 발달 '혼신의 열정'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3.05.0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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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사진가의 한국 사진史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창립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이해선, 한사람 건너 현일영.

예술사진가들

정인영 <사진가>

예술사진의 등장은 일제시대 1920년대에 이르러 취미로 사진을 찍으면서 금전이나 보수를 원하지 않는 사진가들로 하여금 사진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예술적 관점을 가지고 사진기술서적과 사진잡지를 구입하여 한 장의 예술사진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사진활동을 예술로 인식하면서 카메라 메카니즘 기록과 표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술사진을 이야기할 때 먼저 1913년 7월 1일자 매일신보 성우사진공모전에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오후’를 출품하여 2등 당선한 최창근을 살펴본다.

최창근은 1914년 미국 폴딘의 책을 번역하여 '자택독습 최신사진술'로 출판, 초보사진가들이 사진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하였다.

최창근은 이 책을 출판하기 이전부터 중앙기독청년회 학교에 사진과를 신설하고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면서 사진예술의 대중화에 앞장서 사진교육의 선구자로 불렸다.

1937년 전후하여 구성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출신인 현일영과 이해선을 보자.

이해선 '촌동', 1941년 일본사진연감 수록 작품.
이들은 일본의 사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과 사사건건 간섭하고 제약하는 일본관원의 무자비함 속에서 아마추어 사진 발달에 혼신의 열정을 발휘하였다.

현일영은 사진을 생명으로 하고 독특한 모더니즘과 형식 미학을 추구하는 사진예술을 하는 등 치열한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현일영은 또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과 사진가들이 인식하지 못한 소재를 찾아 파격적인 앵글과 프레임으로 형상화한 사진을 찍었다.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의 창립회원이었던 이해선은 조선왕족 출신(황실의 인척)이면서 사진예술에 눈 뜬 사진가로 서양화처럼 빛에 의한 정물표현에 주안점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는 사진예술단체이면서 특히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일본인은 철저히 제외한 한국사람들만으로 회원을 구성했다.

현일영은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에서 사진예술 향상과 이론실기 발전에 대한 지도를 하고 사진인구도 늘리는데 힘썼다.

1933년에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사진예술연구단체를 설립하였다.

진실된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을 사진의 생명과 사진의 힘이라고 믿으면서 사진예술의 길에 선 임응식은 피그먼트 인화방법과 연초점렌즈를 이용한 피사체변형촬영으로 특이하고도 실험적인 사진작품을 발표하였다.

강대석 '어머니상' 1930년대.
그런가 하면 예술단체의 신문화운동과 연계하여 사진활동이 행해지면서 무용계와도 교류하여 무희 최승희를 찍은 사진가로 신낙균이 있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최승희를 인공조명을 이용하여 촬영한 신낙균은 경성사진사협회 창립과 이 협회가 운영하는 YMCA사진과에서 박필호와 함께 정규적인 사진교육으로 후진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또 형이 경영하는 사진기자재 가게에서 임응식을 만나 사진의 길에 들어선 이형록은 1939년 ‘전원’을 발표하여 농촌의 서정적 풍경묘사를 하였다.

일제가 풍기문란이라 하여 제재하던 시기에 누드사진을 찍은 사진가가 강대식이다.

강대식은 1930년대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누드 사진촬영으로 1918년 이후 외설로 판단한 일제의 규제를 피해갔다.

일제의 누드 사진에 대한 단속은 사진예술성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 보다는 사회의 안녕을 해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제통치 하에서 사진예술 발전과 사진가 양성에 따른 사진인구의 양적 발달은 예술사진의 질적 향상과 다양한 사진사조로 이어졌으며 한국사진가만으로 민족 자긍심 고취가 되었다.

1933년 이전에 결성된 경성사구회가 한때는 신낙균의 지도를 받은 아마추어 사진가들로 수백명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들이 어떠한 사진활동을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

어쨌든 조선에 사진이 들어온지 40여년이 경과한 동안 사진예술의 끊임없는 교육과 양성, 그리고 그 사진가들의 활동이 일제의 다양한 방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성과를 이룸으로써 일반 사회단체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임응식 '양지' 연초점사진, 1935.

강대석 '누드'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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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촌가', 매일신문 '성우사진공모전' 2등 당선작 191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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