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이름이여
꽃다운 이름이여
  • 정민영 <서원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5.0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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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정민영 <서원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요, 군자이신 고(故) 동천(東泉) 조건상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자 사랑이 유별난 국어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서예가이신 우송(又松) 이상복 선생님의 인품과 재주를 끔찍이도 아끼셨다. 그래서 당신께서 바로 서예와 학문의 대가이시면서도 나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를 우송 선생님 문하로 보내어 한문을 강독하고 서예를 연마하게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나와 같은 새내기 국어학도에게 학문의 바른길과 학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유난히도 강조하시면서 국어학에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청원군 내수읍에 공군 부대를 건설할 때였다. 귀중한 국어 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순천 김씨 묘 출토 간찰을 고분에서 발굴하자마자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구김을 펴고 다리미로 조심스럽게 다려서 보여 주시며 국어사 자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그 덕분에 나는 몇백 년 동안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서간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과분하게도 퇴고의 과정에 있던 선생님의 저서 ‘해설 역주 언문지’의 교정을 도와 드리며 원고의 작성에서부터 탈고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그때 보여 주신 학자로서의 꼼꼼함과 논리의 치밀성은 국어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두고두고 사표로 남아 흐트러지는 마음에 채찍이 되곤 한다. 시문에도 일가를 이루신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에서 특선의 영예를 안을 때면 ‘꽃다운 이름이여, 아름답도다.’라고 노래하시며, 그때마다 모든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승님의 높은 뜻을 헤아리는 ‘꽃다운 이름’이고 싶다. 그러나 학문과 예술에 도무지 재주가 없는 나에게는 언제나 다가가려고 노력할수록 멀어져 가기만 하는 꽃다운 이름이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교수가 되어 미국으로 국외연수를 떠날 때도 ‘훈민정음(訓民正音)’ 영문 본을 손에 쥐여 주시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 주셨다. 미국에서 돌아와 미처 찾아뵙기도 전에, 이웃 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선생님께서 이 못난 제자를 찾고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둘러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시는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저 왔습니다.”라고 울먹이다 곧바로 학교로 돌아와 서둘러서 강의실로 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면서 강의를 마치고 난 후 곧바로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급하게 울렸다. 짧고 안타까운 영결(永訣)을 알리는 벨 소리였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의 기품과 무언(無言)의 가르침으로 제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던 선생님, “민족 정기와 사회 양심에 어긋나지 마라”고 당부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던 동천 선생님은 내 평생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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