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늙음의 자각
모란, 늙음의 자각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4.29 2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에게 세월은 나이 먹음이다. 세상의 모든 먹음이 삶을 위한 것임에도, 유독 나이 먹음은 예외이다. 세월은 구상(具象)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불감(不感)으로 인해 추상(抽象)으로 인식된다. 그렇다. 느끼지 못할 뿐 세월만큼 그 실체가 분명한 것은 없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흰머리는 다소곳한 색시 같은 세월의 꽁꽁 숨겨놓은 적금통장이다. 잠깐 피었다가 지고 마는 봄꽃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벽에 달아놓으신 괘종시계의 굵다란 바늘이다. 청(淸) 나라의 시인 원매(袁枚)에게 괘종시계는 모란이었다.

◈ 봄날 우연히 읊다(春日偶吟)

白髮蕭蕭霜滿肩(백발소소상만견

백발은 쓸쓸하여 서리가 어깨에 가득한데

送春未免意留連(송춘미면의류연)

봄은 보내도 정만은 여전히 남아있네

牧丹看到三更盡(목단간도삼경진)

모란꽃 보다가 깊은 밤 모두 새운 것은

半爲憐花半自憐(반위연화반자련)

반은 꽃이 애달파서요 반은 내 자신이 애달파서라오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라고 읊은 영랑에게 모란은 봄, 아니 세월 그 자체였다. 모란이 없는 봄은 봄이 아니므로, 봄이 왔음에도 그는 봄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란이 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란이 피고 지는 것은 결국 세월 감이요, 나이 먹음이다. 이러한 모란을 시인은 짐짓 심각한 마음으로 주시(注視)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굵은 음을 토하면서, 건전지가 허용할 때까지 돌아가는 괘종시계처럼 모란은 피었다가 똑똑 떨어진다. 그러나 모란이 괘종시계가 된 것은 시인이 세월을 감지(感知)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젊을 적 시인에게 봄은 놀기 좋은 철이었고, 모란은 늦봄을 장식하는 요염한 자태였을 뿐이다. 그러던 봄과 모란은 날카로운 시계바늘이 되었다. 마치 지나간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진흙 위의 수레바퀴처럼. 아직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도 시인의 계절은 이미 가을이다. 스산하게 뒹구는 낙엽이며, 어깨에 가득 내려앉은 서리인 시인의 백발(白髮)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몸은 가을이었으되, 마음은 봄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봄이 가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다. 밤 새워(三更盡) 모란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시인은 자각한다. 모란이 세월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이 아니라는 것을. 모란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월에 따라 늙고 사라져가는 유한(有限)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세월 앞에 늙어가는 시인 자신만큼이나 모란꽃을 애달파 하는 것이다.

모란이 피지 않은 봄은 아직 봄이 아니라는 거드름은 젊은이의 치기(稚氣)라 해도 좋다. 파뿌리 같은 머리가 서리되어 어깨를 뒤덮을 때, 모란은 한밤에 소리 없이 대지에 낙화(洛花)를 드리운다. 거센 바람 탓이 아니다. 세월에 순응하는 숭고한 몸짓이다. 모란이 피는 것이나 지는 것이나 모두가 한가지로 세월이라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치기(稚氣)는 그 주인인 젊음과 함께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라는 영랑의 절규(絶叫)는 모란꽃 바라보다 깊은 밤 모두 새운 원매(袁枚)의 관조(觀照)와 동의어(同義語)가 아닌가 영랑에게나 원매(袁枚)에게나 모란은 늙음의 자각(自覺)이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