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무와 버섯
죽은 나무와 버섯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4.1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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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무의 영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크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은 모든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는 것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의지적 행동이라고 여겼다. 알다시피 식물은 숨을 쉬고 있으며, 환기가 되지 않으면 그들도 맥을 못 춘다-맥이 안 뛰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 영혼, 심리의 뜻을 담고 있는 사이코(psycho)의 어원이 되는 프쉬케(psyche)는 숨을 가리킨다. ‘프쉬케’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마치 ‘호흡’(呼吸)이라는 단어가 ‘호’라는 뱉는 소리와 ‘흡’이라는 마시는 소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분명한 것은 호메로스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프쉬케라는 말을 썼고, 죽은 사람에게는 소마(soma)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쉬케는 영원하지만 소마는 유한하다.

숨이 빠져나가면 죽은 사람이 된다. 우리말의 ‘숨지다’는 뜻과 통한다.

이렇듯 숨은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다. 한마디로, 숨을 쉬면 살아있는 것이고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숨을 쉼과 숨 쉬지 않음은 이 세계를 보는 가장 큰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범주가 그것이다. 따라서 식물도 영혼을 가진 생물로 구분된다.

그런데 근대과학에서 동물과 식물을 엄격하게 나누는 바람에 식물은 동물보다 하등생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식물은 동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 양 취급된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겨졌다. 식물을 먹고 동물이 살아가듯이, 식물 없는 동물이 없음에도 말이다.

생물의 관점에서 볼 때 식물이 동물의 종에 비해 훨씬 많다. 많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도 더 강하다. 이렇게 지구의 주인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었다.

전통사유에서는 식물과 동물을 엄격히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산천’(山川)은 무생물이고 ‘초목’(山川草木)은 유생물인데도 이를 하나의 환경이라는 범주로 같이 보고자 했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천지라는 공간에 만물이라는 개체가 살아가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신목’(神木)이라는 표현이 있다. 오래된 나무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어법 속에는 나무에도 정신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고가 오롯이 담겨져 있다.

북미 산간에 영지버섯을 따러 간 적이 있다. 곳곳에 탄피가 널려져 있어 사냥꾼들의 자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고목에는 영지가 붙어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영지는 죽은 나무의 영혼이라고. 산 나무에는 영지가 생기지 않는다. 죽은 지 오래된 나무에도 생기지 않는다. 죽어 얼마 되지 않는 나무에만 영지가 손바닥크기로 삐져나온다. 그렇다면 영지버섯은 죽은 나무의 영혼이 아닐까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나무가 죽자 그때서야 숨어있던 버섯포자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동식물을 구별하지 않았던 시절의 말투로는 영혼의 버섯이라는 뜻의 ‘영지’(靈芝)가 제격이었다.

영지버섯 하나를 다려 먹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무 한 그루의 영혼을 내 몸으로 옮겨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건강에도 더 좋지 않을까. 영혼의 빚은 질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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