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에서
숲길에서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04.0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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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휴일 따사로운 햇살에 창이란 창은 모두 활짝 열고 보니 바람이 상큼했다. 봄빛 속에 마주 보이는 구룡산 식구들 안부가 궁금하여 모처럼 산책을 나서보았다.

굴참나무 둥치마다 혹한을 인내한 이끼들 푸른 숨으로 돋는 등산로엔 어린 딱따구리 서툴게 나무 쪼는 소리가 리듬처럼 경쾌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 표정도 알록달록 봄빛인데 볕살 좋은 자리마다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 동글동글 귀엽고. 진달래 연분홍 꽃잎 파르르 눈길을 끈다.

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양새도 가지각색. 처음 보는 양 요란하게 탄성을 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걸음 물러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는 이가 있다. 더러 찰칵 찰칵 능숙하게 카메라 누르는 이들도 있다. 난 세 가지 유형 모두에 해당한다. 지나는 사람이 없으면 호들갑을 떨고 지나는 사람이 많으면 사진 찍기도 쑥쓰러워 안타깝게 바라만보다 온다.

이리 돌아보면 나는 분명 내향적인 사람이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책임 질 자리에 앉는 걸 두려워한다. 과감한 추진력과 유창한 언변으로 좌중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내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내가 요즘 말 잘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말없는 사람인줄 알았더니 말 잘하네’ 란 말을 들으면 참 부끄럽다. 말이 많다는 것과 한가지로 들리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쉬는 시간도 없이 두 시간 강의를 해 버린 적도 있다. 어떤 주제와 상관없이 늘 말이 차고 넘친다.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뭔가 수상하다. 자리가 파하고 돌아서 올 때마다 후회를 하고 가끔은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나도 모르게 대화중 공감할 때 의견을 표시하고. 답답할 때나 침묵이 불편할 때 서둘러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내가 변화하고 있는 걸까? 가끔 또 다른 내 모습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는데 얼마전 수전케인의 『콰이어트』를 읽고 위안을 받았다면 웃을까.

우리안의 내향성과 외향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책인데 내용에 의하면 나는 뼛속까지 내향적인 사람에 속한다. 그런데 내향적인 사람도 필요에 따라 외향적인 사람처럼 연기하는 일이 가능하단다. 앞에 나서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싫은 일을 할 수 있는 강한 내면을 내향성인 사람들은 갖고 있단다. 외향성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무작정 나는 내향성이기 때문에 나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옳지 못하다니 이보다 더 한 위로가 없다. 다만 ‘자기감시(self-monitoring)’란 말을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늘 살펴보고 상황에 따라 나의 말과 행동을 즉시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라 불리면 어떤가 다만 그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 아닌지 돌아보면 될 일.

숲길에선 짧은 시간에도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스러진다. 숲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걷는 사이 내 안의 속살도 함께 더듬어보는 시간. 그래서 숲길을 걷는 건 참 좋다.

하산 길. 지나는 이가 생강나무를 보고 산수유라 하는데 나는 망설이다 또 그냥 지나친다. 어쩔 수 없는 내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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