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8.16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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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통화
오 미 경 <동화작가 >

불볕더위가 누그러질 새도 없이 기세등등하던 엊그제 오후. 중요한 전화 통화를 할 데가 있었고. 급히 써야 할 글도 있어 이래저래 바쁜 시간이었다.

핸드폰 벨소리가 한낮의 더운 공기를 갈랐다. 낯선 번호였다. 수화기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점을 치느라 바빴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자기 신분을 밝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들어봤냐 하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듣기 거북할 정도로 나를 추켜세운다.

자신은 그 곳에 입사해서 갓 교육 받고 나온 병아리 사원인데. 자신이 교육 받은 것을 잘 실천할 수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이런저런 판촉 전화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며 바로 끊어버리는데. 바쁜 와중에도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잡아당겼다. 잠깐의 망설임 뒤에 "네" 라고 해버렸다.

무엇이 내 마음을 잡아당긴 걸까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는 말에. 어쩌면 이 전화통화 성사 여부가 연수 점수에 포함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수첩을 들고 옆에서 점수를 매기고 있는 영상까지 스쳐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이 전화 한 통에 사회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을 텐데. 잠깐 시간 내서 들어주자. 그런 마음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중간 중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대한 홍보가 섞인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나와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가만 들어보니 그냥 각본에 짜인 대로 읊어대고 있었다.

사이사이 자연스럽지 못한 웃음을 추임새처럼 넣어가면서 말이다. 그래도 참고 들었다. 그 사회 초년생은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버적버적 진땀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은 중학생이지만 내게도 딸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서투른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듯이 그녀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서투른 배우는 곧 결정타 한 방을 날렸다. 그녀는 내게 선배님이란 호칭을 썼는데(그 쪽 계열의 베테랑에게 얼마나 교육을 받았을까) 선배님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주 명랑한 것이 활동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난 어처구니없어 그냥 웃었다. 내 목소리가 그리 명랑한 편이 아닌데다. 썩 내키지 않는 통화라 더구나 그랬는데 명랑한 목소리라니!

그녀가 완전히 대본대로 읽는다는 것이 증명 된 셈이었다. 게다가 전화 내용은 점점 자회사의 제품 홍보로 기울었다. 말하자면 이제부터 본론이었던 것이다. 순진한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내가 바쁜데도 전화를 끊지 못하고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던 것은. 그 사회초년생이 너무 서툴러 오히려 그 것이 동정심을 유발시킨 탓도 있었다.

나는. 급히 통화할 데가 있어서 미안하지만 더 이상 통화할 수 없다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그런데 웬 걸 '그러세요' 하더니 다시 대본대로 자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얼마 뒤 다시 똑같은 얘기를 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오르는 화를 누르며 조금은 쌀쌀맞은 어투로 다시 말했다. 아뿔싸! 그녀는 이제 숫제 내 이야기를 무시한 채 자기 말만 했다.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더 이상 통화할 형편이 아니니 끊겠어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건 폭력이다. 기분이 언짢았지만 사실 내 화살은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회 초년생을 향해 있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만이 사는 길이고 그 경쟁에서 지면 죽음인 자본주의 사회. 내 화살은 그 쪽을 향한 것이었다.

집에 있다 보면 이런 광고성. 영업성 전화를 하루에 몇 통씩 받을 때도 있다. 모두 살아남기 전략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경쟁 일변도로 치닫는 현대 사회! 그 끝은 어디일까

우리 아이들이 사회인으로 서게 될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일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위까지 가슴에 열을 보탰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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