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군가
그 누군가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3.03.2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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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내가 출근하는 길은 다른 도로에 비해 한적하다. 도로 옆으로 저수지가 있고 사계절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 7년을 같은 길로 출근을 해도 싫증나지 않는다. 그런데 200~300미터 간격으로 신호등이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도심에서의 신호등은 목숨에 관련된 중요한 것이기에 나부터도 아주 잘 지킨다. 그런데 내가 출근하는 길에서 신호등을 지키고 있으면 지나가는 운전자가 오히려 “바보 잘난 척 하고 있네” 라고 비웃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눈치껏 하는 편이다. 남들이 가면 나도 묻어 쫓아가고 옆 차선의 차가 지키고 있으면 주춤하는 마음으로 덩달아 서곤 했다.

한 달 전쯤이었나 보다, 뒤쪽에서 경찰차가 따라 오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아무 생각 없이 빨간 신호등을 지나쳐 내달렸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바로 뒤따라오던 경찰차가 '삐용 삐용’ 하더니 “36xx번 우측으로~~”하는 것이다. 아뿔싸~~ 머리를 쥐어박아 봐도 소용없는 일, 차를 도로 옆으로 세우고는 자진해서 지갑을 열어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경찰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경찰차가 따라 오는데 위반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뒤미처 내린 젊은 경찰이 딱지를 끊으려고 내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쳐다보는 경찰관한테 할 말이 없었다. “난 늘 지키지 않았어요” 라고 할 수도 없어 머뭇거리며 “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고 미처 신호등을 보지 못했어요” 라고 군색한 변명을 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상습적으로 신호를 지키지 않는 분은 아닌 듯하다. 오늘은 그냥 보내 줄 테니 앞으로는 신호를 잘 지키기 바란다”며 면허증을 돌려줬다. 너무 뜻밖의 처사라 어리둥절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날 이후 출근길에서 절대 신호 위반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옆 차가 그냥 지나가도 꿋꿋하게 지킨다. 상습적인 위반자가 아닐 거라면서 날 믿어 준 경찰관 때문이다. 딱지를 끊었더라면 그날만 재수가 없었다는 생각으로 입맛을 다셨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여전히 위반을 하고 다녔을 것이다. 처음 본 경찰관의 믿음이 나를 변화시켰다. 딱지를 수 십 번 떼도 이런 효과는 거둘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작년에 대학입시를 앞둔 한 수험생이 엄마를 죽여 안방에 숨기고 몇 개월을 지낸 사건이 벌어졌다. 그 엄마는 성적에 유독 신경을 써서 성적이 떨어지면 밤새 야구 방망이로 때렸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성적표를 고쳐서 보여드렸는데 며칠 후 있을 자모회에 엄마가 오게 되면 들통이 날 게 분명하서 죽였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케이스가 있다. 경상도 모 대학 총장까지 했던 분의 어릴 적 얘기다. 언젠가 성적이 훨씬 뒤떨어져 꾸중을 들을까 두려운 마음에 성적표를 1등으로 고쳐서 보여 드렸더니 아버지는 동네잔치를 벌였다. 성적표를 고친 것도 죄스러운 일인데 잔치까지 벌였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었고 필경에는 대학 총장까지 지낸 어느 날 사실대로 말하려고 서두를 꺼내는데 그 아버지가 말을 끊으면서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가끔 그 경찰관이 떠오른다. 내게 보여 준 믿음이 나를 변화시킨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믿음을 보여 주리라 생각했다. 거짓이라는 게 빤히 보일 때도 한 번의 기회로 그 사람이 바뀔 수 있음을 헤아리며 눈감아 주는 마음이고 싶다. 똑같이 성적표를 위조한 것인데도 한 사람은 부모를 죽이는 파렴치한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를 지켜보고 믿어 주는 그 누군가가 있는 한 빗나가지 않는다. 한때 잘못된 길에 빠진다 해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에 결국에는 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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