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 잎 따다가
버들 잎 따다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3.2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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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득 궁금증이 동한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는 왜 하필 버들잎을 땄을까?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계절인 봄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버들잎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물가에 서식하는 관계로 해동(解凍)의 봄물을 가장 먼저 빨아들이는 행운의 주인공이 버드나무이고, 그 생기(生氣)가 고스란히 스며든 것이 버들잎이다. 게다가 연록(軟綠)의 빛깔로 치장한 버들잎의 자태(姿態)는 그 자체가 봄 아니던가? 당(唐)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은 이러한 버들잎을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 버들을 노래하다

碧玉成一樹高(벽옥장성일수고)

푸른 옥으로 단장하여 키 큰 나무 한그루 되었나?

萬條垂下綠絲(만조수하녹사조)

만 갈래 가지마다 녹색 실 가지 늘어졌네

不知細葉誰裁出(부지세엽수재출)

가느다란 나뭇잎 누가 마름질했는지 모른단 말인가?

二月春風似剪刀(이월춘풍사전도)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와 같도다

※ 귀하디귀한 푸른 옥(碧玉)도 버드나무 앞에서는 한 개의 단장(丹粧) 소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명품족이라도 온 몸을 푸른 옥으로 휘감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드나무만은 예외이다. 키가 큼에도 불구하고 그 큰 키를 온통 푸른 옥이 감싸고 있으니, 호사(豪奢)도 이런 호사(豪奢)가 없다. 그리고 여느 나무들에 비해 가지가 월등히 많은 게 버드나무라서, 만(萬) 개는 족히 될 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모두 하나같이 녹색 실로 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푸른 옥으로 온 몸을 휘감았다거나, 녹색 실로 된 가지를 드리웠다거나 하는 말들은 버들잎의 빛깔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버들잎의 빛깔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는지, 시인은 버들잎의 생김새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생김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아예 없다. 다만 잎이 가늘다(細葉)고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잎이 가는 것이 그냥 된 게 아니다. 마치 가위로 정교하게 마름질(裁)이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크기로 자그맣게 만들어진 버들잎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이 정교한 솜씨의 장인(匠人)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조물주(造物主) 정도로 예상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시인의 대답은 독자들의 의표(意表)를 찌른다. 음력 이월(二月)에 봄의 온기(溫氣)를 잔뜩 품고 부는 봄바람이 버들잎을 만든 장인(匠人)이라는 발상(發想)은 참으로 기발하다. 봄의 따스한 기운을 받아 버드나무에 잎이 돋았을 터이므로, 봄바람이 버들잎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름질(裁)의 주체로 봄바람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버들잎을 마름질한 장인(匠人)이 봄바람이라는 시인의 대답은 반전(反轉)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보아도 좋다. 그래서 시인은 부연(敷衍)한다. 봄바람이 가위(剪刀)와 흡사하다고 한 것이다. 봄바람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더구나 따스한 속성의 봄바람을 날카로운 속성의 가위(剪刀)를 통해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더욱 어렵다. 버들잎의 생김새에 대한 경탄을 표현한 시인의 솜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봄바람이 마름질한 것은 버들잎만이 아니다. 겨울을 참아내고 소생한 봄의 생명들은 무어라도 버들잎이요, 그것들의 장인(匠人)은 모두 가위 공력(功力)의 봄바람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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