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4>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8.1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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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제일교회

단양서 뿌리내린 94년 복음의 역사

1912년 10월 엄대환씨에 의해 설립 영춘(永春)은 글자 그대로 봄이 길고 따뜻한 곳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 졌으며. S자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산. 물. 바람. 인심이 좋아서 살기좋은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7일 영춘 기독교 대한감리회 영춘제일교회(담임목사 박진환)를 방문하기 위해 이른아침 집을 나섰다. 7월 집중호우로 영춘지역의 피해 상황을 TV를 통해서 보았지만 도로가 파이고. 강뚝이 무너져 곳곳에는 농작물을 쓸고간 피해 흔적으로 참담했으며. 당시 폭우피해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름산과 물줄기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바쁜일정과 불볕더위로 여유롭게 창밖에 눈길 줄 겨를도 없이 꼬불꼬불 힘겹게 영춘제일교회에 도착했다. 영춘교회는 1912년 10월 15일 설립됐다. 이 산골 벽지마을. 기독교 복음의 불모지였던 영춘에 당시 단양군에서 제일먼저 복음이 들어온 곳이 영춘제일교회다. 1912년 당시 영춘의 인접마을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대야리 영월중앙감리교회에서 믿음을 키워온 엄대환씨가 영춘으로 이사 오면서 영춘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 1918년 9월 4일 기독신보 영춘교회 관련기사 (엄씨의 믿음)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에 사는 엄소사씨는 청춘 과부로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근근이 금전을 모아 생활을 곤란을 겪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주변에는 일점 혈육이 없음으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이 때 예수교에 마음을 두고 믿기로 작정한 후에 점점 신심이 돈독하여졌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의지하고 기쁘게 지내던 중 그의 자비함이 친족과 이웃에게 미쳤다. 그는 영춘교회 시작의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별히 감사할 일은 영월교회를 위하여 30원을 연보했다. 그래서 종각을 하늘높이 세우고 종을 사서 매달았다. 주일 아침에는 '뎅~뎅~' 종치는 소리에 사방 그늘 속에 깊이 잠든 영혼의 고막을 깨우치고 있다. 엄씨의 믿음과 열심이 모든 형제자매의 모범이 될만하기에 두어 말씀 감사의 글을 적는다. -  예배처소를 마련하지 못해 마루에서 예배를 보다 이외에도 영춘교회에 대한 기사는 종종 기독신보에 실렸다. 특히 1937년 기독신보 3월 31일자 관련기사를 보면 영춘교회에서 10일 동안 본 지방 감리사를 청해 부흥전도회를 열었는데. 몇 해 동안 이런 큰 잔치를 맛보지 못한 농촌지역에서 저녁마다 모여드는 사람들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부흥회 기간에 새신자가 83명이나 되었고. 교인들도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창기 예배처소를 마련하지 못해 엄대환씨의 마루에 포장을 치고 남·여 따로 예배를 보던 교인들은 가정예배에 어려움이 있어 교회터를 물색하던 중 엄대환씨의 집 앞에 초가 7칸을 짓고 영월감리교 지교회 영월구역회로 발족했다.
당시 영월구역 조근영 담임목사가 영월과 영춘을 오가며 예배를 인도했다. 특히 영월중앙감리교인 김미애 전도 부인은 일시 영춘교회에 머물면서 복음전파에 전력했다. 이즈음 경상도에서 예수를 믿다가 이사온 이태응 권사 가정을 비롯해 최인식. 이선숙. 지경구 외 70여명의 교인이 모이게 됐다.

초가에서 장소가 협소해 예배에 불편을 겪자 1930년 엄기범씨가 개인의 땅을 구입해 엄대환. 조재국. 이태응 권사 등. 모리스 선교사의 협조로 예배당을 신축 봉헌했다.

일본의 정치 탄압으로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한성태 전도사가 부임하고. 엄대환. 조재국. 이태응 권사 최인식씨 등이 힘을 합쳐 믿음과 기도로 교회를 지키며 교회는 부흥 발전해 자립의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영춘교회 교인들의 굳은 믿음과 한 전도사의 업적으로 크게 꼽는 것은 일본정치 탄압과 한국전쟁 속에서 교회와 사택을 꿋꿋하게 지켜낸 점이다. 1953년 한 전도사가 전출되고. 최정덕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다. 최 전도사는 청소년들이 흥미를 느끼면서 교육과 복음현장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청소년 프로그램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6년 2월 23일 교회내 분열로 인해 영춘면 하리에 영춘제일교회가 초가 8칸의 예배당을 마련해 교인 60여명이 나갔다.

그후 38년만인 지난 2002년 갈라져 있던 지역의 두 교회 (영춘교회와 영춘제일교회) 교인들은 제일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헌당식을 갖기에 앞서 예배당에서 해당 두 교회가 통합하기로 결의하고. 영춘제일교회 김기식 목사를 담임으로. 영춘교회 정수환 목사를 부담임으로 정했다. 그 후 두 교회 통합에 성심을 다했던 김기식 목사는 은퇴하고. 정수환 목사도 교회를 떠났다.

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목회 방향성을 어디에 두고 있냐"고 질문을 하자. "선교"라고 말하는 박 목사는 두 교회가 통합하면서 영춘제일교회를 시무하게 됐다.

"37년 긴 시간 만큼이나 깊게 패인 갈등의 골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를 두고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몇 년 지난 지금은 교인들간의 갈등의 골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박진환 목사는 요즘 기도제목이 생겼다. 그것은 교회사택으로 사용하던 옛집 'ㄱ'자형 안채를 문화재로 등록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싶다며 옛집으로 안내했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돼 지붕이 허물어지고 마당에 풀은 무성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기둥과 보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튼튼하고 구조도 견고하게 남아 있어 옛날 선조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박 목사는 이 옛집이 "100년가까이 된 건물로 기독교적 역사 의미도 크지만 한국미의 발견과 사라져가는 근대 한옥의 보존이라는 점. 그리고 민간차원의 문화유산 보존·활용의 모범적인 사례로 그 의미가 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영춘교회 창립 100년 기념행사로 단양읍쯤에 영춘교회 지교회를 개척하고 싶다며. "구인사의 영향력이 큰 영춘지역에서 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교회와 지역사회와의 관계는 지역사회의 개인. 가족. 집단. 조직체의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선교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박 목사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 교회가 사회로 나아가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선교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영춘제일교회는 연말 영춘 초·중학교 졸업식 때 장학금 30만원씩을 주고 있으며. 이웃 미자립 교회 6곳을 돕고 있다.

영춘지역 40여년 구인사 역사에 비해 94년 결코 짧지않은 기독교 복음의 역사를 통해 영춘제일교회는 지역의 미래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전위대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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