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영혼
나무의 영혼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3.2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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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아침에 걸어오다가 교정에서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겨울이라 나무들의 잎사귀가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데, 어느 나무의 어느 가지에만 말랐지만 풍성하게 잎들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 가지는 꺾여 거의 뒤집혀 있었다. 지난 여름 태풍 때문인지, 어느 날 불어온 강풍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길로 다니면서도 눈에 띄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보인 것이다. 요즘 산수유가 꽃을 피우고 목련은 망울을 맺어 주위의 나무들은 어떤지 올려보다가 만난 광경이었다.

나의 의문은, 왜 다른 가지들에는 잎사귀 하나 붙어있지 않는데 꺽인 그 가지에만 마른 잎들이 무성하게 붙어있느냐는 것이었다. 걸어오면서 정리한 추측은 이렇다.

흔히 우리는 추운 겨울이 와서 잎을 마르게 해서 잎사귀들을 떨어트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무가 추운 겨울이 오고 물을 먹기 어렵게 되자 스스로 잎사귀들을 말려 수분흡수를 조정하고 있던 것이다.

만약에 나무 스스로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냥 자연의 현상으로 잎사귀가 떨어진 것이라면, 꺾인 나뭇가지의 잎들도 모두 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꺾인 가지에 있는 나뭇잎들은 다만 말라비틀어졌을 뿐이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모두 잘 붙어 있었다. 다른 가지에 나뭇잎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낙엽이란 과연 나무의 강한 의지에 따른 옷 벗기였지, 겨울이라는 온도의 변화에 따른 수동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잎사귀 하나 붙어있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속에서 꺾인 채 다른 가지에 걸쳐져 있는 그 가지의 무성한 나뭇잎이 증거였다. 꺾인 나뭇가지는 앞사귀를 떨어트리겠다는 자기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채 타력에 의해 꺾였기 때문에 겨울을 지나면서도 조금도 잎을 떨어트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날씨가 나뭇잎을 떨어뜨린 것은 맞다. 그러나 날씨에 따른 나무의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냐는 것은 이런 상황을 놓고 따져보아야 한다. 그저 추워져 잎이 떨어졌다는 것은 나무의 의지가 개입될 소지가 거의 없다. 나무는 날씨에 따라 잎을 떨어트려야 할 뿐이다. 그러나 같은 나무줄기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부러진 가지에는 비록 말랐지만 온전히 잎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은, 나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잎사귀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수많은 낙엽은 모두가 살아있는 나무의 능동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다. 겨울에 사람의 손과 입술이 트듯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낙엽은 나무가 추위에 상처 입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선택이자 방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에도 프쉬케라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숨을 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아니마라는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언젠가부터 움직이는 것만 아니마를 가진 것으로 취급됐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동물이라는 뜻의 애니멀(aminal)은 곧 ‘아니마를 가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애니메이션’(animation)은 ‘영혼을 부여함’을 가리킨다. 여러 장 그림을 그려놓고 빠른 속도로 넘기면 죽은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활동만화를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만난 그 나무는 자신이 영혼을 가진 것이라고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에 무성한 잎사귀를 자랑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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