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유니버시티에서 멀티버시티(multi-versity)로 바뀌어야 한다.
대학은 유니버시티에서 멀티버시티(multi-versity)로 바뀌어야 한다.
  •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3.18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며칠 전 서울 모 대학의 문리대 출신 동료와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전통적으로 문리대는 문·사·철을 비롯하여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즉 순수, 기초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 단과대학이었다. 동료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분야, 곧 의대, 경영대, 사범대, 공대, 농대 등은 문리대의 주변부에 불과하였고, 진정 대학다운 대학은 문리대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동료는 문리대 출신으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료와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방금 언급했던 것과는 상반된 이야기를 들었다. 기초 및 순수학문 분야의 졸업생은 취직이 잘 되지 않으니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학도 이제는 상아탑의 고고함을 벗어던지고 사회적 요구와 수요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의 영어 표현인 university는 하나를 의미하는 uni-와 진리(veritas)를 의미하는 verse의 합성어이다. 곧 다양한 가치를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는 조직이 대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대학은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장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앞에서와 같이 상반된 주장과 가치가 충돌하기도 한다.

오늘날, 상아탑으로서의 대학 이미지는 많이 퇴색하였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이르는 우리의 실정에 비춰보면 대학은 이미 소수정예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 기관이 아니다. 대학이 보통교육 기관으로 자리잡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해당 학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상아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많은 학생들이 의대나 법전원과 같은 실용학문 분야로의 진학을 원하고,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경영대로 몰려가며, 취업률이 낮은 인문계 학과, 기초나 순수학문 분야를 선호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대학은 오래전부터 취직을 위한 전초기지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기초학문과 순수학문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대학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 다양한 분야가 공존하고 있다.

대학처럼 구성원, 전공, 업무의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는 조직은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상명하복의 군대 혹은 이윤을 매개로 한 기업의 일사불란한 조직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모래알 조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일견 모래알 조직처럼 보이는 대학의 현재 모습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한국 대학의 존립을 위한 기본조건이며, 대학의 과제는 다양한 규범, 가치, 기능의 공존과 공조를 통해 최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기초 학문을 중심으로 나머지 분야를 주변부로 치부하여 등한시하거나, 아니면 응용-실용 학문을 중심으로 순수-기초 학문의 무용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현대사회는 통일성, 획일화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시대이다. 리더가 설정한 하나의 목표를 구성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행동양식이 필요한 조직이 있다. 그러나 다양한 가치와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일사불란함, 상명하복의 질서는 불가능하다. 곧 대학에서 하나의 기준이나 가치를 중심으로 여타의 분야를 줄 세우는 건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학은 사회조직과 차별화되는 나름의 고유한 조직문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 다양한 가치를 하나로 통합하는 유니버시티는 오늘날 대학의 정체성을 살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의 새로운 조직문화는 각 분야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멀티버시티(multi-versity)를 통해서 확립될 수 있다. 이제 유니버시티 방식의 대학 운영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멀티버시티로서의 대학 운영방식을 고민할 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