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억한다.
너를 기억한다.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3.03.1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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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얼마전,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삼일절 행사를 지켜보았다. 학창시절에도 그 날은 휴일이었기에 행사에 참여할 일은 별로 없었다.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고 33인이 서명한 뒤 의암 손병희가 선포했다는 독립선언문을 들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에선 삼일절 노래를 제창했다. 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나도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놀랍게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던가 싶어 텔레비전을 끄고 초등학교 때 외웠던‘국민교육헌장’에서부터 광복절과 개천절 제헌절 등의 국경일 노래를 불러 보니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것이다. 그 동안 흐른 세월이 수 십 년이고,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거늘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물건 하나를 찾으려해도 둔 곳을 몰라 쩔쩔매고,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옛날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친구에게 말을 했더니 자기도 다 기억하고 있다면서 줄줄이 읊어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대로 저장되는 것일까? 그런 기억력이라면 공부도 일등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또 이상하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에 길들여져서 그렇다고 했지만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최근 들어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떠오르고 있는 치매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특징이며 누구에게나 두려운 병으로 손꼽히고 있다. 치매환자가 한 집안에 있으면 모든 가족의 일상이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그래서 다음에 늙더라도 치매만은 걸리지 말자고 치매예방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데는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을 잘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기억력은 또 훈련을 통해서도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기억력 대회에서 챔피언을 한 미국의 론 화이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단어를 외우고 숫자를 암기하는 피나는 노력으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기억력은 타고난 것이거나 유전이라고만 생각했지 끝없는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요상한 것이어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어린 시절부터 시시콜콜 다 기억이 나 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누군가 내게 서운하게 했던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선명하게 기억되는 게 보통이다.

반대로 좋은 기억 때문에 현재의 나쁜 기억을 잊게 되는 케이스를 보았다. 오래 전 근무하던 직장에 바람둥이로 유명한 상사가 있었다. 새는 앉을 때마다 깃을 떨어뜨린다고 하더니 그 사람이야말로 가는 데마다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데 아내하고는 뜻밖에 잘 살고 있었다.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게 늘 화제거리였고 그러다가 우연히 상사의 아내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여자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남편하고 10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그 기억이 너무 좋아 남편을 용서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노라고 했다. 아름다운 추억은 곧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할 정도의 증오심과 질투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그 상사 아내의 웃음 짓던 표정은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내개 주어진 시간의 절반 이상을 살아버린 것 같다. 앞으로도 늘 좋은 기억만 되뇌이며 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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