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소통의 리더십을 요청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소통의 리더십을 요청하고 있다.
  •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3.0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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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현대 사상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다양성이란 통일성, 획일성에 대립되는 말이다. 20세기 이전의 사상은 통일된 질서에 다양한 구성요소를 끼워 맞춰 하나의 전체적 체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다시 말해 과거의 사상은 인간, 사회, 자연, 우주를 하나의 통일적 체계 안에 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의 질서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배제되고 배척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곧 통일성과 획일성을 추구하는 사회나 제도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폭력적이고 강압적이 될 수밖에 없다.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양한 목소리의 개인과 집단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과거 사상의 폭력성과 강압성을 목격한 현대의 지성인들은 획일화된 질서와 통일적 체계 대신에 사회의 여러 의견과 입장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사상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는 이와 같은 사상적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이 사상들은 목소리 큰 사람이나 집단, 다른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제도와 체제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곧 이들은 서로 다른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를 인정하면서도, 사회 내의 다양한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타인을 제압하기보다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근원부터 재검토하는 것이 이들 사상의 기본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전의 사상의 중심이 자기(ego)였다면 현대 사상의 중심에는 자기보다는 타자(他者)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타자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 백인우월주의 세계에서 멸시를 받아왔던 유색인종, 부자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 권력자에게 통치의 대상이었던 피치자 등이 속한다.

현대사상은 타자(他者)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낌으로써 탄생한다. 곧 타자(他者)는 소유나 지배, 통치의 대상이 아니며, 중심 세력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사상은 시작된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하는 다수가 무서운 존재임을 인식함으로써 현대 사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하는 다수를 지배와 통치,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침묵하는 다수와 소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구시대적인 사람이라는 말이다.

현대 사회의 리더는 통치하거나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그런 리더를 요구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말만 듣거나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도 리더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라고 하기 어렵다. 이런 리더들은 모두 불통의 리더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소통의 리더십을 요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근본은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듣는데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무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진정 두려운 것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소통의 리더, 곧 현대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열흘이 되었다. 아직도 새로운 정부가 정식 가동이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대통령은 취임했는데 정부조직이 채 갖춰지지도 않았고, 같이 일할 사람의 진용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당이나 야당은 서로 상대를 불통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 쪽은 한 치의 양보도 불가하다는 불통의 리더십을 비판하고, 다른 쪽은 그러한 비난을 발목잡기의 전형 즉 구태정치의 표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뭐라고 비난을 하던 그들은 여전히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침묵하는 다수가 눈을 뻔히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다수가 두고 보기만 할뿐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보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는 자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두려워할 줄 아는 소통의 리더십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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