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새봄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03.0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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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베란다 화분을 갈무리하며 새 봄 준비하는 소식들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꽃샘추위로 꽃소식은 좀 늦어진다는 예보와 별개로 우리 집 베란다에는 봄물이 번져 초록빛으로 산뜻하다.

훌쩍 자라 긴 허리를 간들거리는 상사화, 빼곡한 잎사귀 틈새를 비집고 꽃망울이 올라오는 군자란, 말갛게 새 뿌리가 돋는 풍란, 자스민 화분에서 더부살이 하는 별꽃, 베고니아 사프란, 국화, 꼬리풀까지.

쏟아지는 햇살에 못이겨 툭툭 문을 열고 나온다. 푸른 물로 번지는 수다에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열고 내다보는 요즘. 긴 겨울 혹한을 인내한 시간들이 생각나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신비롭고 기특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돌이켜보면 요 며칠 감사한 일이 많다. 한 낮 <마티네 콘서트>에서 익숙한 클래식을 감상하며 그런 여유가 주어짐에 행복했고,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외롭고 고단한 길 올 곧게 걸어온 선배가 예쁜 며느리 얻는 날 기쁨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고단하단 말없이 출근하는 남편도 고맙다. 오래 떨어져 있던 큰아이가 곁에 있어 따뜻한 밥 지어줄 기회가 주어지니 또한 기쁘다. 나이 들수록 유난히 소소한 일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잊기도 하지만.

크리스토퍼 해밀턴은 <중년의 철학>에서 삶에 자그마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일들을 더 잘 인식하게 되는 것이 중년이라고 했다. 젊은 날 원대하게 세웠던 계획들이 대부분 분별력이 없거나 허영심에 가득 찼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 내면은 오히려 자유로워진단다. 진정한 행복이란 껍질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소소한 즐거움들은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쉽게 감동하고, 비사교적이라 달콤한 말을 잘 못하는 내가 요즘은 새삼 모든 관계에 너그러워지고 고마움을 꺼내어 표현하는데 익숙해져간다. 때론 능청스러운 느낌마저 들어 스스로 화끈해질 만큼 과감해졌다.

중년은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있다는 말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중년이 문제가 많은 시기인 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자아와 강력한 생명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아 두개가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중년에 이르러 열정적으로 다방면에 도전하여 꿈을 이루어가는 벗들이 많다. 화려하고 눈부시고 뜨겁다. 하지만 그 열정만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큰 것도 사실이다. 소리 없이 살금살금 무너지는 몸에 대한 불안이 수다의 주제로 오르는 게 일상이 될 만큼 좌절감을 가져온다. 그럴 때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 되감기하며 향수에 젖기도 하고 집착과 불만으로 어지러웠던 마음을 비우느라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도전하고 좌절하며 포용하고 인정하며 성장한다. 그래서 중년은 아름답다. 젊음이 따라올 수 없는 또 다른 빛깔의 멋을 가진, 열정과 고뇌가 살아있는 중년은 인생의 새봄이다.

다시 새봄. 들판에도 어서 푸르게 봄이 돋아, 늦은 밤 외로움과 불안 때문에 젖은 소리로 건너왔던 내 친구 그녀, 꼬물꼬물 가려워져서 세상으로 난 문을 활짝 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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