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 양철기 <교육심리학 박사·충북도교육청 장학사>
  • 승인 2013.02.2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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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학 박사·충북도교육청 장학사>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올 1월, 신병훈련대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한권의 책,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찔러 주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한다. 그는 후방에서 편히 근무할 수 있었으나 최전방으로 자원하여 격전장이었던 러시아, 이탈리아 등의 최전방 참호에서 전투를 치르며 낡은 메모장에 명제들을 써나갔다. 그 메모장의 명제들이 묶여 현대철학의 방향을 언어탐구로 전환시킨 결정적 저작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 phicus)’가 되었다. 최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경험은 이 논고에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철학적 함축을 더해 주었다. 그는 이 한편의 논문으로 학계의 신성(神聖)으로 떠올랐다.

오스트리아 최대 철강재벌의 막내아들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에게 재산은 짐이었다. 유산을 오스트리아의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기부하고 누나와 형들에게 양도한다. 짐을 벗은 그는 교육대학에 입학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빈 근처의 수도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다가, 1920년 오스트리아 동북부에 있는 시골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1922년 전장에서 쓴 그의 원고 ‘논리-철학 논고’가 출간됐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학계에서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경이로운 책의 저자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대학에서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를 모시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다. 1926년 그는 한 학생에 대한 체벌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교사직을 포기하고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로 일을 하며 철학적 성찰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사(哲學史) 집필자가 그가 등장하는 부분을 놓고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독창적이고 난해하면서도 기이한 사상가이다. 1999년 타임지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끼친 100명을 뽑을 때 철학자 중 유일하게 선정됐다.

비트겐슈타인은 20년의 세월을 바쳐 ‘철학적 탐구’라 불리게 될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을 쓰다말고 자문했다. “먼저 괜찮은 인간이 되지 않고 어떻게 훌륭한 논리학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않으면 참된 철학을 세울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껏 저지른 모든 잘못과 죄를 낱낱이 기록해 그 대상자들을 찾아다니며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한 예로 초등학교 교사시절 열정적으로 가르치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챘다. 그러다 한 아이가 실신을 하였으며 그는 도덕적 자괴감으로 그날로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10년 만에 그는 그때의 아이들을 찾아가 일일이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는 자기 내부의 파렴치를 씻어내려 마지막 한 점의 자존심까지 내던졌다.

평균치의 윤리적 감각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범인들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극단적이고 결벽증적이다. 그러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권위는 이 극단적 행위에 담긴 자신에 대한 엄격성, 윤리적 진지함과 성실성에서 나온다. ‘깨끗한 마음 없이 깨끗한 철학 없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신념이었다.

훈련병 아들이 신병훈련소에서 ‘논리-철학 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과 대화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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