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상처, 곡계굴
6·25전쟁의 상처, 곡계굴
  • 김명철 장학사 <충북도교육청 학교정책과> 
  • 승인 2013.02.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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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장학사 <충북도교육청 학교정책과> 

6.25전쟁은 동족상잔과 피로 얼룩진 역사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비극이다. 민족의 마음에 커다란 빗장을 채운 슬픈 전쟁의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고 분단의 현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자연과 하늘이 숨 쉬는 아름다운 단양에도 그 눈부신 아름다움으로도 결코 씻을 수 없는 6.25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6.25전쟁 당시 평화롭던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곡계굴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에서 내려온 피난민과 느티마을 사람들이 곡계굴에 피난하고 있었는데, 이를 적으로 오인한 미군기의 공습으로 400여 명이 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1.4 후퇴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이 소백산맥을 따라 안동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미군은 계속적으로 마을 일대를 포함한 남한강과 소백산 일대에 대한 정찰비행을 실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1년 1월 20일 미군기 4대가 동굴에 대한 사격을 감행하여 이처럼 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난길에 나섰을 당시 미군은 일반 피난민의 이동을 통제하여 남하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주민들은 전쟁터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조치와 함께‘우군으로 확인되지 않는 모든 집단, 군대, 장소에 대해 지상의 무력과 공중 폭격을 동원할 것’, ‘적의 은신처로 사용되거나 사용될 것으로 의심되는 전방 주거지나 건물들을 지체 없이 조직적으로 파괴’한다는 참혹한 명령이 더해졌다.

그 결과 단양·영월·예천·풍기 등 소백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이 이뤄졌다. 이 폭격은 주변의 거의 모든 민가가 폭격의 피해를 입을만큼 극심한 것이었는데 미군 측 자료에 의하면, 단양에서 경북 예천에 이르는 전 지역의 75%를 불태웠다고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싹쓸이 작전이었다. 주민들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각지 파놓은 방공호에 숨어 살아야 했다. 단양 영춘면 느티마을의 비극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느티마을의 곡계굴은 수백 명이 들어갈 만한 굴이었다. 당시 피난길도 끊기고 폭격 때문에 집에도 머물 수 없었던 주민들은 낮시간을 거의 모두 굴속에 숨어 지냈다. 굴 안에는 마을 사람만이 아니라 영월 등의 가까운 지역에서 피난 온 이들도 많았다. 정찰기가 굴의 주변을 거듭 정찰하였으나 민간인인 그들이 직접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월20일, 오전부터 공습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굴 밖에 폭탄이 떨어졌고, 뒤이어 무차별적인 기총사격이 지속됐다. 굴 밖에 잔뜩 쌓아 두었던 가재도구나 이불에 불이 붙어 점차 굴 안으로 불길과 연기가 밀려들었다. 그 결과 당시 굴속에 있던 이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거의 질식해 죽고, 굴 밖으로 뛰쳐나온 일부 사람들도 기총사격을 받아 거의 사망했다.

현재 마을 입구에는 곡계굴의 참상을 알리는 비석과 곡계굴 입구 앞에는 아픈 역사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다시는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비극은 없길 바라며, 평화통일을 이룩할 그날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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