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대장금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1.31 2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한류라는 중국어가 우리말로 정착한지 꽤나 됐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다들 한류라는 말을 쓴다.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코리아의 K를 따서 ‘K 팝’ 등과 같이 쓴다. 오늘 내가 말하려는 것이 K 드라마다.

아쉽게도 연속극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띄엄띄엄 봐도 줄거리를 대충 알겠는데다가 영화에 비하면 꽉 짜이지 않아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핑계를 댄다. 그런데도 착실히 본 드라마가 있다. ‘대장금’이다.

내가 드라마를 제대로 보게 된 까닭은 외국생활 때문이었다. 한국드라마가 우연히 수중에 들어왔고 덕분에 ‘연속극’을 ‘연속적’으로 볼 수 있었다. 재밌었다. 오랜만에 잘 들리는 언어도 감미로웠고, 잘 생긴 배우도 탐스러웠다.

이 드라마가 수출되는 바람에 외국친구들에게는 ‘한국인들은 늘 그렇게 먹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도 답해야 했다. 임금님 밥상인데, 한국인이라면 모두 그렇게 먹는 듯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나도 서양 사람은 모두 배우처럼 잘 생긴 줄 알았다. 평균적으로 보면 누가 뭐래도 한국 사람이 더 나은 데도 말이다. 특히 몸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드라마의 특징이 무엇일까? ‘대장금’을 보면서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희극과 비극이 섞여있는 희비극의 모습이었다.

비극은 엄숙하고 장엄하다. 그래서 비극은 평균이상의 사람을 그린다. 희극은 경망스럽고 촌스럽다. 그래서 희극은 평균이하의 사람을 그린다. 사람이 닮지 못할 신을 흉내 내면 비극이 되고, 사람이 닮아서는 안 될 개를 흉내 내면 희극이 된다.

그런데 ‘대장금’에서는 주인공의 비극적 삶이 그려지는 동시에, 주인공을 키워준 양부모의 희극적 삶이 그려지고 있었다. 희극과 비극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혹여나 그리스비극에 심취한 사람은 ‘우리에게는 왜 참다운 비극이 없나’고 한탄할지 모른다. 그러나 천만 아니다.

그리스비극이라는 말조차 어원을 따지자면 ‘양의 탈을 쓰고 하는 연극’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 제전이라는 의미이지 슬프다는 뜻이 담겨져 있지 않다. 국가적으로 하는 축제극이 비극이라고 번역되는 것이며, 지방에서 그냥저냥하는 연극이 코메디로 불렸던 것이다. 게다가 축제는 희극 셋, 비극 하나 정도로 섞어 공연도 했다.

우리 전통극은 그것이 탈춤놀이가 되던, 마당극이 되던 희극과 비극을 모두 집어넣어 웃기고 울리기를 반복했다. 당연히 감정의 폭이 클수록 감동도 크게 다가온다. ‘대장금’이 곧 그랬다.

나는 이런 우리 드라마의 원류를 ‘춘향전’에서 찾는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비극구조와 향단이와 방자의 희극구조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는 미국드라마는 웃기거나 울릴 뿐, 엄정함과 명랑함이 함께 섞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양극도 초기에는 ‘광대’가 꼭 출현했으니 그것이 희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익스피어에서처럼 광대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 웃기려고 작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의 ‘악인’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추악한 진실을 말하면서도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으므로 ‘대장금’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우스개 푼수 덕분에 대장금이 돋보이고, 연기력 있는 악한 덕분에 장발장은 멋져 보인다. 참다운 악인 없는 참다운 선인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