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설야(山中雪夜)
산중설야(山中雪夜)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1.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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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적막강산(寂寞江山)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아마도 눈 덮인 겨울 산일 것이다.

도회지에 조밀하게 모여 사는 요즘 사람들이 적막함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밀폐된 공간에서 방음(防音)으로 조용한 것은 적막(寂寞)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적막(寂寞)함에는 개방된 공간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 외에 인간의 번다한 모습도 보이지 않아야 된다. 자연조차도 평소에 분주해 보이던 모습이 감춰지면 적막감(寂寞感)은 절정에 이르는데 눈 덮인 겨울 산이 바로 그 모습이다. 고려 말의 시인 이제현(李齊賢)은 이러한 적막(寂寞)을 제대로 맛보는 복을 누렸다.

◈ 산속 눈 내리는 밤(山中雪夜)

紙被生寒佛燈暗(지피생한불등암)

종이 이불에 한기 돌고, 불등은 어두운데

沙彌一夜不鳴鍾(사미일야부명종)

사미승은 한 밤 내내 종을 울리지 않았다.

應嗔宿客開門早(응진숙객개문조)

응당 자던 손님 일찍 나간 것을 꾸짖겠지만

要看庵前雪壓松(요간암전설압송)

암자 앞 눈에 눌린 소나무 보려했을 뿐이네.

무슨 연유로 산에 들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어느 산속인지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산속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암자에서의 잠자리는 조촐하다.

얇디얇은 종이 이불과 부처님 전에 밝힌 등불이 전부이다. 이불을 덮었지만 한기(寒氣)를 피할 순 없고, 불전 앞의 등불은 꺼질락 말락 가물거린다. 낯선 절간에서 시인은 잠들지 못하였지만, 암자에 익숙한 어린 사미승은 고단한 수행으로 달콤한 잠에 빠져 날 새는 줄을 모른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니었고, 요란한 소리도 아니었지만 밖에 눈이 내리고 있음을 시인은 직감한다.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을 울려야 하건만, 종을 울려야 할 사미승은 단 잠에 빠졌다. 이때까지도 시인은 잠들지 못한 채, 종소리만 기다리던 차였다. 천진난만(天眞爛漫)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사미승은 큰스님의 호통 따윈 안중에도 없다. 조바심이 난 것은 하룻밤 얻어 묵는 신세인 시인이었다. 애당초 시인이 잠들지 못한 것은 차갑고 낯선 잠자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날이 새도록 잠 못 든 건 이 때문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내리는 것을 알아챈 눈 때문이었다. 눈 자체보다도 눈 덮인 산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였던 것이리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지 않자 시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자 문을 열고 나서면서도 꺼림칙한 것은 객이 정해진 시간 한참 전에 객이 먼저 암자 문을 여는 것이었다. 늦잠에서 깬 사미승의 투덜거림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을 참지 못하게 한 것은 흰 눈의 유혹이었다. 간밤의 눈이 소복이 쌓인 암자 앞의 소나무의 모습이 너무나도 궁금하였던 것이다.

사미승마저도 잠에 빠진 새벽, 암자 앞 소나무를 누르고 있는 하얀 눈은 적막강산(寂寞江山)의 눈부신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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