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둥이
흰둥이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1.1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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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큰아들이 한쪽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들어섰다. 며칠 쉬다갈 채비를 하고 왔나 싶었는데 가방 지퍼를 여는 순간 너무나 깜짝 놀랐다. 양쪽 귀가 얼굴만큼 큰 강아지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까만 눈과 마주쳤다. 까만 강아지인데 이름은 흰둥이라고 했다. 나는 진짜 너무 싫었다.

“아이 징그러워라“

내가 서서 음식을 만드는 동안에도 흰둥이는 내발을 핥았다. 소름이 쫙 돋았다. 흰둥이 주둥이의 균이 내발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수돗물 소리가 더욱 세졌다. 강아지는 신기하게도 금새 환경에 적응이 되는지 왔다갔다 분주했다.

오래전에 강아지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한지공예가 B선생님이 생각났다. 두 마리의 애견을 키우셨는데 은실이와 영심이였다. 선생님 댁에서 모임을 갖는 날은 은실이와 영심이도 으례 바쁘기만 한 날이다.

우리는 스카프염색과 한지그림을 작업했다. 명주에 염색이 곱게 배어들면 깊이 모를 신비감을 전해주는 환상적인 색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각자 만들어낸 단 하나뿐인 색깔에 반해 감탄하면서 작업 하는 내내 두 녀석은 온 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일을 저질렀다. 우리가 앉아 쉬고 있을 때면 두 녀석은 무릎에 날름 올라와서 온갖 애교를 부렸다. 이런 애견이지만 나는 위생상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한 번도 기르지 않았다. 강아지가 옆에 올라치면 주인 몰래 발로차기도 하고 밀어놓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그날, 오신 손님을 따라 나간 은실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피투성이 강아지를 끌어안고 슬프게 우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난생처음 보면서도 퍼뜩 비상사태를 수습할 일이 난감했다. 일단은 S언니의 도움으로 자동차에 싣기로 하였다. 사방으로 다니다 용산리 마을 야트막한 뒷산 오솔길 옆에 묻어주고, 내려오는 길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 후로 시름에 잠긴 선생님의 모습을 자주 뵈었었다.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아득한 일이다.

내가 오랜 전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흰둥이는 내발을 연실 건드렸다. 장난을 거는 건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다. 기분이 참 묘했다.

나도 한번 만져보았다. 털은 보드랍지만 뜨거운 체온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자꾸 만져보았다. 묘한 감정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지난날 시누 네가 강아지를 데리고 왔을 때 냄새난다고 바깥채 솔잎공방으로 밀쳐 넣은 일이 생각난다. 발버둥 치며 나오려고 문창호지를 죄다 찢어놓아서 몇 시간 후 안채로 데리고 들어왔었다. 시누이 가족이 가고난 후 문창호지 바르느라 하루를 꼬박 부역했던 일이 떠오른다. 또 놀러오겠다는 말에 “이젠 강아지는 놓고 오세요” 이렇듯 모질게 대했던 미안함과 함께 전혀 영악하지 않은 흰둥이에게 현혹되어 변해가고 있는 현재의 내 마음에 놀라고 있다. 정말 큰맘 먹고 흰둥이를 안아 보았다. 그랬더니 흰둥이는 아예 내 무릎에 와서 잠까지 청한다.

지난날 미물이라도 가족같이 여겼던 은실이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가족이 친정에 오느라 놓고 올 수 없어 데리고 온 강아지를 맹물로 대했던 야박스런 일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우리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친해지려면 “먼저 다가가라”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면서도 정작 다가가질 못했던 내 마음을 이제나마 여는 중이여서 기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런데 마음먹기가 참 힘이 들지만 마음을 열면 이리 쉬운 것을.

※ 변정순씨

음성에서 수필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으며 음성문인협회, 충북문인협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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