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 TV
바바리 TV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1.03 2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여전히 연예인들의 연말시상식이 활개를 친다. 부화가 난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맞으면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곧 방송3사다.

시청률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연말에 방송 3사의 개별적 시상식을 열면 정말로 시청률이 올라가나? 연애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잔치를 벌이면 방송국의 수입이 극대화되는가

공중파를 잘 보지 않더라도 12월 31일 마지막 밤에는 어떻게 한해가 가고, 어떻게 한해가 오는지 마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번에도 자사 방송프로그램에 대한 시상식으로 방송3사가 도배를 하고 있었다. 12월 31일 자정을 생중계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오히려 유선방송의 뉴스프로그램이었다.

10만의 인파가 서울의 보신각 종 타종행사에 몰렸다. 예년에 없는 강추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뭔가?

0시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없다. 달력이라는 것이 자연의 현상을 인위적으로 분획한 것일 따름이라는 주장도 맞다. 그래서 1월1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생일도. 기념일도, 기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어느 날짜를 정해,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거나 추도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서로의 공감대를 넓히는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날이니 우리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구나.’

‘오늘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우리 자손들은 그분의 삶과 은혜를 돌아보면서 더욱 잘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새기고 또 새기겠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싸우다가 돌아가신 순국선영을 기리는 날이니 나도 조국을 위해, 동포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국과 동포가 촌스럽다면 사회와 이웃이라고 해도 좋다. 해방이 내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부끄럽다면 진정한 독립을 꿈꿔도 좋다. 삶이 조상의 은혜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면 그것을 토론하는 자리라도 좋다. 지나친 사랑이 부담스러우면 차라리 내가 사랑을 보답하는 날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날은 있는 것이고, 뜻은 거기에 따라붙는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했던가? 문은 형식이고 질은 내용일 터, ‘질문빈빈’이라고 하지 않고 ‘문질빈빈’이라고 한 까닭은 형식 없이는 내용을 담기 어려움을 토로한 것 아닌가. 날이 있어야 뜻이 담기지, 뜻만 있어서야 어디에 담기 어려운 것 아닌가.

12월 31일은 정말로 뜻을 담기에 좋은 날이다. 적어도 밤 12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연예인의 잔치로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내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내 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담으라니 공중파의 횡포가 지나치다. 아니, 연예대상을 통해 나에 대한 사랑만이라도 기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나의 외모도 재능도 의상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니 자괴감만 깊어진다.

심하게 말하면, 올해도 공중파는 노출증의 단면을 보여주고 말했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여성 앞에서 남성을 드러내는 그런 폭력성을 말이다. ‘바바리 맨’이 아니라 ‘바바리 TV‘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