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忘却)
망각(忘却)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2.12.1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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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얼마만큼 달려와서 저리도 숨이 찬 걸까. 겨울바람 소리가 문밖에서 숨이 차다. 따라서 내 몸도 숨이 차다. 나는 감기중이다. 몸이 아프고 열이 나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이전 저런 해야 할 일들과 만나야 할 얼굴들로 가득하다. 쉬고 있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12월이다. 감기가 아니라도 이런 계산을 내려놓아야 하는 달이다. 하지만 감기라도 남은 계산을 더욱 치밀하게 해야 하는 달이다. 일 년의 마지막 이즈음 나는 아직 살아있고, 계절은 너무 춥다. 12월을 맞은 마음은 늦가을부터 이미 얼어버렸다. 따뜻한 곳으로 마음을 데려가고 싶다. 아니 따뜻한 곳을 다녀 올 생각이다. 그곳에서 얼었던 것이 녹듯이 얼었던 마음을 녹여내고 기억에 냉동된 꿈쩍도 않는 것들도 녹여서 흘려버리고 올 것이다. 다 잊어버리고 비워서 새해를 새 마음에 담고픈 것이다.

나 없는 이곳 추위 속에서 모든 원색적인 말을 모르던 어린왕자가 흰 눈을 이고 나타날 것이다. 시야에 거슬리던 모든 것을 하얗게 지우고 남녀노소 누구나 잊혀 진 동화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허약함을 사랑한 나의 죄도 덮였다 녹아버릴 것이다. 잠시라도 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탸샤와 흰 당나귀를 노래했던 백석시인처럼 나를 사랑해서 기다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파서 수시로 마음속 오욕칠정에 진저리 치고 부대끼며 달려온. 어느 새 12월이라 말하진 말아야지. 우리들 속에 나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 가운데 나의 눈물을 얹으며 기도 해야지. 기도 속에서 우리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린왕자가 덮어 버리는 폭설의 시간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에 신이 눈감고 기다려 주는 시간임에 감사해야지.

우리들 서로 돌아보면 제발 잊어버렸으면 싶은 사건들이 있지. 생각하면 제발 잊어버렸으면 싶은 사람이 있지. 그러나 잊혀 지지 않아서 밤잠을 설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모든 일들이 내게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리고. 그러다 내가 정말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친척에게 마음 준 것을 후회하면서 울어도 이미 때는 늦으리. 그리하여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나를 망가뜨리는 일이기 때문에 오래 미워하지 못하고, 어서 잊기를 갈망하다가 시간이 약이라고 그렇게 잊혀 진 이후. 정말 이만큼 서서 생각하면 내가 어찌 잊었나 싶게 대견한 자신......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안도의 쉼을 내 쉴 때.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망각>이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면서, 미웠던 사람도 같은 존재로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귀한 인연이므로 체념하며 미움을 내려놓게 되는 거지.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지. 주인공 미레크는 자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레테이아(letheia)의 조합. 라틴어에서 진실(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니라 망각(oblivio)이라니.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 미레크는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한 것이지. 우리가 살면서 끝내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너무 절실하거나 너무 치욕적이어서 망각이란 이름 앞에 오래 서성이게 하지.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알지만 정작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알게 되지. 아직 한 장의 지구가 넘어가기 직전 12월. 우리들 속, 내 마음 첫눈은 오시지도 않고 나는 속없이 감기만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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