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32년
  • 이제현 신부 <매괴 여중·고 사목>
  • 승인 2012.12.0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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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제현 신부 <매괴 여중·고 사목>

한 영화의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얼마 전에 그 영화 제작을 위한 모금에 참여했었습니다. 그 때는 역사적으로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것을 알고, 실제로 개봉될 지에 대해서 반신반의(半信半疑)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연대의 결실을 시사회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영화의 끝에는 그 영화제작을 위해 참여한 두레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내용도 감동적이었지만, 제작에 참여했던 이름 모를 이웃들과 함께 한 자리여서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웹툰은 6년 전에 나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배경으로 삼은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32년 만에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자유, 권리를 최대의 가치요 미덕으로 여기는 오늘날에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영화를 위해 시민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7억원을 모아야 했던 현실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성경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비추어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부와 명예와 권력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래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호소하였고,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에, 그들은 다시 왕을 원했습니다. 온갖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켜주고 함께한 것은 하느님이었는데, 다른 민족들처럼 현실적으로 통치할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왕은 백성들을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고 했고, 하느님도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를 지었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제자리걸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몸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가난에서 탈출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 과거의 독재, 폭력, 전쟁 등의 상흔에서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해야 할 때를 놓쳤고, 제대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선거 때마다 이를 망각하고 잘 살게 할 수 있는 왕을 요구하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잘 살게 되었습니까?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시대에는 힘센 골목대장이나 우두머리 같은 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떠받들며 섬기는 종이 필요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느님께 반항한 역사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 돌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들의 역사는 신앙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역사도 신뢰의 역사로 바꿀 때입니다. 32년의 어두운 역사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새롭게 우리가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역사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미 남북으로 두 동강 난 우리나라가 동서로도 찢겨지는 비극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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