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진면목
여산진면목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1.2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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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어떤 사물이건 늘 일정하게 보이진 않는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날씨나 계절, 시간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그 사물의 모습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사물마다 진면목(眞面目)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설사 진면목(眞面目)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일까? 백두산에 올랐다하여 누구나 천지(天池)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天池)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천지(天池)가 없는 것이 백두산의 모습이겠지만, 그것이 백두산의 진면목(眞面目)은 아닐 것이다.

송(宋)의 시인 쑤둥포(蘇東坡)가 백두산을 보았을 리는 없지만, 그는 일찍이 산의 모습이 보기에 따라 각양각색임을 시로 그린 바 있다.

◈ 서림벽에 제하다(題西林壁)

橫看成嶺側成峯(횡간성령측성봉)

가로질러 보면 고개더니, 옆으로 보니 산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마다 제각기 같지 않도다

不識廬山眞面目(부식여산진면목)

루산의 참 모습 알지 못한 채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다만 이내 몸을 이 산 속에 의지할 뿐

중국 장시(江西)성에 위치한 루(廬)산은 사시사철 안개로 뒤덮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산 안에는 둥린(東林)과 씨린(西林)이라는 곳이 있는데, 씨린삐(西林壁)는 씨린(西林)에 위치한 절벽 지역이다. 루(廬)산 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또 하루 중 어느 때인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물끄러미 씨린삐(西林壁)를 바라보다 문득 깨닫는다. 평소 무심코 보았을 때는 늘 그렇고 그러리라고 여겼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렇질 않다. 누구라도 살면서 한두 번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냥 절벽이려니 했는데, 가로 질러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절벽이 아니고 고개(嶺)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개려니 했는데,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또 그게 아니다.

이번에는 산 봉오리(峯)다. 무슨 조홧속인지 궁금해진 시인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보기로 한다. 멀리 가서 봤다가, 가까이 와서 보기도 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 봤다가, 낮은 데로 내려가서 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씨린삐(西林壁)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시인은 평소 별 생각 없이 봐왔던 주변의 풍광이 그 본연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루(廬)산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의 여지없이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루(廬)산이었지만, 사실은 그 진면목(眞面目)을 안 게 아니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진면목(眞面目)이란 조물주(造物主)가 만든 본연의 모습이란 뜻으로, 이 말 속에는 사람이 평소에 알고 있는 내용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루(廬)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여겼다니, 이 얼마나 허황되고 오만한가? 시인의 생각은 씨린삐(西林壁)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품고 있는 루(廬)산으로 옮겨졌지만, 이는 비유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시인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 자각한 것이다. 자신의 지식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은 오만하다. 시인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지식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그 본 모습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시인 자신이 루(廬)산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했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시인은 그저 루(廬)산에 의지하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진면목(眞面目)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더라도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아니다. 지식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지식에 대한 확신은 오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루(廬)산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단 쑤둥포(蘇東坡)만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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