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엔 그녀가 있다
그 곳엔 그녀가 있다
  • 정규영 <청주 중앙동>
  • 승인 2012.11.26 2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정규영 <청주 중앙동>

그 곳엔 그녀가 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어떤 미동도 없이, 어떤 감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화사한 분홍 저고리를 입고 곱게 단장 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있다. 영정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물론 많은 지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의 모습이 하나 같이 급하게 대충, 집에 있는 사진으로 꾸며지는 게 속으론 꽤나 불만이신 듯 했다. 십년 전 쯤 둘째 아이의 돌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을 방문했었다. 아이의 좀 더 예쁜 모습, 나은 모습을 찍고자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웃기고, 까꿍을 반복하는 사이 어머니는 곱디고운 한복으로 갈아 입으셨다. 고운 한복은 내 결혼식 때 혼주로 입으셨던 분홍색 한복이었다.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던 한복이었다. 나와 남편은 어머니의 모습에 당황했다. 가족사진 찍을 때 입으시지 왜 지금 갈아입으시냐며 핀잔을 섞어 물었다. 언제 사진사하고 약속은 하신건지,

“사진사 양반, 찍읍시다. 잘 찍어주세요” 하신다.

“엄마, 증명사진 필요하셔?” 해도 묵묵부답.

살짝 머금은 미소로 모든 답을 뒤로 미루신다. 사진사와 필름 속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선 내게도 물어 보신다. 인화되진 않았지만 진짜 고운 새색시 모습이었다. 화장도 한복도 한데 어우러져 너무 고우셨다. 내 흡족한 모습을 보시고선 이제야 입을 여신다. ‘영정사진’이라고 하셨다. 본인 사후 지인들과의 만남의 모습. 순간 기분이 뭐라고 해야 되나. 화가 나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찡하고 복잡 미묘했다. 때가 아직 아닌데, 왜 이리 서두르시냐고 열 번이라도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어머니도 아는 나이이기에 눈으로만 묻고 답했다. 잠깐의 적막 속에 우리 모녀는 모든 걸 수긍했다. 준비할 만한 연세이고 본인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겠다는 강인함에 ‘죽음’이란 단어는 그리 무섭고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벌써 십년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여전히 그녀는 그곳에 그대로 있다. 자리이동 없이 처음 우리 집에 온 그때 그대로.

어머니는 십년 전과는 다르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약해지셨다. 하지만 내 곁에 따뜻한 온기를 내뿜으며 계신다. 그리고 나는 고아가 아니다. 어머니 덕에.

얼마나 다행인가. 그 곳의 그녀하곤 조금 더 흰머리가 많아지고 주름이 늘어난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똑같다. 너무 일찍 준비해 지인들이 못 알아보면 어쩌냐는 실없는 농담을 어머니께 건넨다. 고운 모습으로 끝까지 여인이기를 원하신 걸 알기에 사진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하다. 추하게 늙지 말고 자식에게 짐 되지 않게 조용히 숨 거두게 해달라고 잠자리에서 염불마냥 되뇌이시는 기도를 나는 오늘도 듣는다.

가을의 끝자락이 너무 스산하다. 때 이른 추위가 야속하다.

창밖의 잎사귀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가 그녀의 어깨마냥 축 쳐진 듯해 가슴 시리다.

언젠가는 그녀가 그곳에서 내려 올 거란 것도 안다. 거실 한쪽에 자리 잡은 그녀는 내 맘을 알까. 아직 그녀 없이는 세상 살기가 겁나는 겁쟁이 딸인 것을 알기나 할까. 사람이기에 때가 되면 가는 게 순리라고 순리를 따르라는 어머니의 마음 같기에 미소가 더 애잔하다.

그 곳엔 그녀가 있다.

그 곳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식을 응원하는 그녀가 있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