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2.11.13 2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가을이 남긴 이별의 손수건들이 거리를 뒹굽니다. 차바퀴에 깔립니다. 환경미화원의 자루에 담깁니다. 낙엽하면 이별 하는 일을 떠올리지만, 사람도 이별하는 일로 시간을 흘려보내며 누군가의 마음에 담기고 버려지는 일들로 하루를 보냅니다. 달리고 앞서가며 벌어지는 일들로 마음이 치이고 아파합니다.

오늘이 어제를 이별했으며, 가을은 여름을 떠나보내는가 싶더니, 내쳐 겨울의 문턱까지 달려와 숨을 고르느라 나무마다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어 댑니다. 이별을 바라보는 마음도 낙엽의 색깔만큼 다양합니다. 노인들은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순명을 생각하듯 평정을 찾으려 합니다. 중년은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는 일만 남겨둔 동반자의 쓸쓸함으로 연민을 가집니다. 놀러 나온 청춘과 아이들은 빛깔 고운 낙엽을 줍고 던지며 까르르 까르르 행복해 합니다.

폐렴에다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는 잔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잔스의 집 건너편에는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저 잎들이 다 떨어지면 나는 죽겠구나’라고 잔시는 단정합니다. 이런 잔시의 절망감을 함께 살고 있는 ‘수’가 아래층에 살고 있는 늙은 무명화가 ‘버만’에게 전합니다.

이튿날 잔시가 ‘잎새가 다 떨어졌을 거야’ 라며 창을 열었는데, 담쟁이 줄기엔 잎사귀 하나가 여전히 달려 있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는 달려 있었고 잔시는 삶의 용기를 얻어 회복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에게서 “마지막 잎사귀는 아래층 버만 아저씨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린거야” 찬 비바람 때문에 급성폐렴에 걸려 죽은 버만의 이야길 전합니다. 잔시의 생명을 구한 것은 10%의 생존율을 내 비친 의사도 약도 아니었으니, 버만이란 무명화가 였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작가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운명을 그를 순하게 버려두지 않아서. 세 살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들은 낳자마자 죽었으며, 아내는 어린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새로 만난 여인에게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은행공금횡령죄로 복역했으며, 교도소의 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 마가레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으며, 복역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 헨리’란 필명을 써야했습니다. 모파상과 체호프와 더불어 세계3대 단편소설 작가이지만, 그의 글은 반전의 결말로 유명하지만 그의 생애 반전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생태학적으로 낙엽이란 나무가 살기위해 떠나보내는 것이고, 이것이 식물의 배설이라면 동물인 사람이 먹은 것을 배설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영양소를 만들어 가지를 살리고 키우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 햇살이 줄어드는 추운계절로 접어들면서 나뭇잎을 계속 매달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지니, 나무는 할 수 없이 한 계절 자신의 분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묵묵히 실행할 뿐입니다.

‘마지막 잎새’에서 버만은 표면적으론 실패한 화가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준 걸작의 화가입니다. 오-헨리는 불행한 일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은 남아서 소박한 행복의 조건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직도 가르쳐줍니다. 이별이란 것은 먼- 훗날, 아니 당장 내일을 보장하는 거룩한 의식이라서 이 계절 ‘마지막 잎새’란 작품과 함께 매일매일 엄청난 뉴스거리를 펼치는 대선 후보자를 생각합니다. 대선이 끝나고, 내일을 위해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모습이 ‘마지막 잎새’의 여운처럼 대한민국을 새롭게 감동시킬 수 있길 희망해 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