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뒤에서
한걸음 뒤에서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2.11.1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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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산이 좋아서 주말이나 휴일이면 즐겨 산을 찾는다. 산에 가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먼저 오르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적지 않다.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기가 싫어 한걸음 뒤떨어져서 간다.

어느 산악인은 ‘산이 있으니 오른다.’고 하였지만 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산행을 한다.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바람 소리와 졸졸 흘러가는 계곡물은 나의 삶의 활력소로 다가와 마음이 행복해진다.

어느 산이든 조그만 암자나 절이 있게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산행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아내의 음성 같은 은은한 풍경소리가 들려 마음이 평온해진다. 대웅전에 들러 늘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건강과 자식들의 미래를 염원하는 삼배를 드릴 수 있어 좋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산행이야말로 나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 마음으로 통하는 지기들과 어울려 산행하다 보면 심신의 피로도 말끔히 풀린다. 나이를 먹는 것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산과 들이 내 유년시절 간직했던 꿈과 희망으로 다가온다.

허둥대며 보냈던 시간과 힘겨웠던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려 심호흡을 해본다. 맑은 공기를 가슴속 깊이 들여 마시니 산 능선의 등고선은 어느새 내 마음에 파도로 일렁인다. 부서지고, 쏟아지고, 밀려오고, 또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일들을 정화하고 있다.

산을 오르면서 바라보는 오묘한 풍경과 생각의 일면들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며 정신을 맑게 해준다. 물소리 새 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산그늘과 계곡이 어우러진 곳에 거대한 물기둥이 떨어지는 장관을 가끔 만날 수 있다.

이끼 낀 바위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신비감을 더해 준다. 폭포들이 토해내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일상에 잦은 나를 닦아주는 바람이 온몸을 옭아매었던 삶의 찌꺼기들을 떨쳐내는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산행을 하다 보면 아름답게 피어난 꽃, 만산을 붉게 수놓은 단풍을 만나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소나기가 내리거나 눈보라를 만날 때도 있다. 산을 오르다보면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계획에 의하여 가고자하는 방향을 선택하면 아무 탈이 없건만 호기심에 다른 길로 접어들다 보면 낭패를 본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같으리라. 어쩌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오르지 못할 때에는 이제껏 살아온 내 인생의 목표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돌이켜 보니 산은 늘 아름다운 계절을 간직하고 있었다.

산은 계절마다 나에게 다른 선물을 주었건만 나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삶의 목적지를 가는 늦가을 즈음의 나이가 돼서야 아! 봄도 아름다웠고 여름도 활기찼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길을 건너면 춥고 외로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 해 뜨고 지는 걸 보며 걷는 것 /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 보며 / 나무 그늘 밑에 잠시 쉬어 가는 것 / 어느덧 해는 서쪽 하늘로 기울고 / 찬바람 불어오고 흰 눈 내리는 겨울 / 길 걷기 급급해 뒤돌아보지 못하고 / 들꽃도 구름도 바라보지 못했네.’

졸시 인생의 전문이다. 지금 껏 그러했듯 한걸음 뒤에서 천천히 한 발 한발 걷다보면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도, 시린 눈꽃도 아름다움으로 맞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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