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가을 편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1.1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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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늦가을마저도 늦어져 가는 이즈음, 길을 걷다 보면 자주 들리는 노래가 있으니 ‘가을 편지’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되는 고은의 노랫말처럼, 가을엔 누군가가 그립고, 그래서 편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리라. 마음만 먹으면 즉시로 얼굴까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편지는 여전히 사람의 애절한 그리움을 담아내는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다. 하물며 소식을 전할 방법이 달리 없었던 시절에 편지가 갖았던 의미는 어떠했으랴! 탕(唐)의 시인 장지(張籍)는 가을날을 맞아 편지를 쓰는 설렘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가을 그리움(秋思)

洛陽城裏見秋風(낙양성이견추풍)

낙양성 안에서 가을바람 만나서

欲作家書意萬重(욕작가서의만중)

집에 부칠 편지를 쓰자 하니 생각은 만 겹이나 쌓여라

復恐悤悤說不盡(부공총총설부진)

허둥지둥 서둘다 할 말을 다하지 못했을까 또 두려워

行人臨發又開封(행인임발우개봉)

집으로 가는 인편 떠날 즈음 또 봉한 것을 열어 보네.

 

당(唐) 시기에 뤄양(洛陽)은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시골에 집을 두고 살아가던 시절에 도시는 가족과 이별한 사람들의 낯설고 외로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가을바람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도지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외로움의 도시와 그리움의 가을바람이 겹친 순간, 시인의 가족앓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고향 가족에게 보낼 편지 쓰기에 나선다.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드러난 것은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이 쌓인 것이 만 겹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무지개떡의 각양각색 찼ㅃ럼 외로움과 그리움이 마음에 쌓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것도 만 겹이나 말이다. 시인은 만 겹의 정을 한 층씩 떼어내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편지에 옮겨, 마침 집으로 가는 인편에 부칠 심산이다. 쓸 것은 많고 시간은 없는 형국이니 허둥지둥 쓸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할 말을 다하지 못했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건만, 잠시 뒤에 다시 조바심이 난다.

부공(復恐)이란 짧은 말에 시인의 조바심이 선명하게 보인다. 총총(悤悤)이라는 첩자(疊字) 하나에 시인의 할 말은 많고 시간은 없는 다급함이 응축되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글자의 운용을 통해서 시적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바심에 조바심을 거듭한 끝에 시인은 편지 쓰기를 마치고 그것을 봉투에 넣어 밀봉(密封)을 하였다. 이것으로 편지 쓰기는 끝났고, 시인의 조바심도 함께 사라졌을 터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조바심은 끝난 게 아니었다. 집 쪽으로 가는 인편이 밀봉(密封)된 편지를 품에 지니고 막 길을 떠나려는 순간, 시인의 조바심은 비로소 절정에 이른다. 이미 몇 번씩 살피고 살핀 끝에 밀봉을 한 편지를 다시 뜯는다는 발상은, 생각하기 어려운 반전(反轉)의 묘미를 살리기 위한 시인의 정교한 계산이었다. 쓸 말이 만 겹으로(意萬重) 쌓일 만큼 많지만, 시인은 그 구구한 내용은 철저히 가린 채, 오로지 편지를 써서 부치기까지의 내밀한 심리상태만을 그리고 있다.

편지 속의 사연은 오롯이 여백으로 남겨두어 독자의 상상력을 무한정으로 자극한다. 설렘과 조바심이라는 표정 연기만으로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이산가족의 애틋한 정을 훌륭히 담아 낸 시인은 거장(巨匠) 영화감독으로도 손색이 없다. 깊어가는 가을 누군가가 그립다는 것, 그래서 편지를 쓴다는 것, 온기(溫氣)를 지닌 삶의 모습은 이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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