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의 풍경
창 밖의 풍경
  •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 승인 2012.11.06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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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가을이 오면서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창문 커튼을 걷어 올리는 습성이 생겨났다. 햇볕에 타는 듯이 익어가는 한낮의 황금들판 정취도 풍요롭지만, 창문 아래까지 자욱이 밀려왔던 부우연한 안개가 걷히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오묘한 새벽 정취는 더욱 신비롭다.

마치 신의 등급을 기다리는 양 이슬을 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이삭들, 밭마다 가지가지 곡식들이 알알이 익어가며 바스락거리는 검불때기로 변해가는 누런 잎들, 논두렁 따라서 한 줄로 사열한 콩 포기마다 주렁주렁 콩들이 익어가고, 밭두렁 따라서 한 줄로 사열한 깨 포기마다 깨알이 통통히 여물어 간다. 곧 서둘러 나온 아침햇살이 은빛 휘장을 말아 올리면, 밭고랑 넘어 앞산 기슭에는 수채화 한 폭이 고운 자태로 널려져 온 동네가 환하다.

가을 철새들이 이별가를 목청껏 부르다 토해 낸 핏자국과 눈물 자국들이 얼룩진 듯,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넋이 빠진 나를 오라고 부른다. 그 절묘한 가을 풍경화 속에 사람이 하나 있다. 급하지 않고 여유로운 안단티노 템포로 논두렁과 밭두렁을 오고가는 한 노인이 있다. 오늘도 새벽잠이 없는 노인이 벌써부터 들판 가득히 지란지교를 나누는 모습이 작은 창문을 통해 한 눈에 들어오는 아침이다.

언제나 홀로 거닐고 있는 노인은 단풍 진 먼 산을 올려다보거나 발치를 내려다보며, 그네들과 무엇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전원을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3년 반 전, 내가 생활터전을 시골로 옮긴이래, 들판을 서성이는 노인의 모습은 나의 풍경화 속에 생명력 있는 유일한 모델이다. 어쩌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노인은 거의 매일 나의 창밖의 풍경화 속에 존재한다. 80대 노부부가 살고 계시는 파란 대문 집은 우리 주방 창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45도 각도에 위치하고 있고, 왼쪽 방향에는 논과 밭들이 가지런히 즐비하게 사열하고 있다.

새순들이 매운 햇살 그물에 걸려 바르르 떠는 이른 봄날 풍경화 속에는, 씨앗을 심으면서 어서어서 움을 틔우라고 입김을 불어넣어서 꽃을 피우라고 성화를 대는 노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진록빛 파도로 아우성치는 보리밭 두렁을 배회하는 노인은 덩달아 활력이 넘쳐 보였는데…. 어느 날 밤새 몰려온 폭우에 자존심과 목이 꺾인 벼이삭들을 일으키고,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고 눈물짓고, 얼른 기력을 회복하라고, 마른 정강이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타이르는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는데…. 여름보다 약간 홍조된 얼굴빛에 웃음까지 감돈다는 것이 요즘 달라진 풍경화속 노인의 표정이다.

풍경화 속의 노인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자락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할 뿐, 머리에 밀짚모자가 얹어졌다 내려왔다 할 뿐, 언제나 두 손은 뒷짐을 지은 채 변함없이 구부정한 자세이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한 것이 노인이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이 한 번도 나의 렌즈 속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가끔 대문 앞에서 햇볕을 쬐며 지아비를 내다보는 모습만이 가끔씩 조명된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설거지 하던 손놀림을 멈추고, 목을 길게 빼고는 어디쯤 거닐고 계시는지 이리저리 찾으며 궁금해 하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러고 나서야 다음 손놀림으로 출근 준비를 서두르곤 한다. 머지않아 단풍잎 찬란한 산기슭 넘어 바람 잦은 억새밭에 무서리가 내리고, 저녁연기가 골목 안에 자욱이 잦아들면 측백목에 숨어 울던 참새 떼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겨울이 오겠지. 아무리 자연 정원이 아름답다 한들 사람이 그려지지 않은 풍경은 얼마나 삭막할까를 생각하며, 빈 울림으로 남아 있을 겨울 풍경화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겨울로 달려가는 붉은 마차를 탄 석양이 오색 불꽃으로 마지막 만찬을 차리고 있는 가을 숲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요즘이다. 창밖의 아름다운 가을 정경을 바라보며 오늘 아침도 생각에 잠겼다. 애틋한 지란지교를 꿈꾸고 있는 한 노인의 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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