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삼우(晩秋三友)
만추삼우(晩秋三友)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1.05 2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모두 다를 터이지만, 가을 정취를 말하면서 국화를 빼놓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낙목한천(落木寒天)에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강직한 기품이 있는가 하면 가을 산야(山野) 어느 곳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박하고 친숙한 풍모에 탈속(脫俗)한 은자(隱者)의 초연한 자태도 두루 갖추었으니, 가을 어느 자리에도 어울리는 게 바로 국화리라.

이처럼 국화가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환영받는 가을 친구인 것은 기왕에 알겠고, 여기에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忘憂物)이라 불리는 술이 합세하여야, 비로소 늦가을 세 친구(晩秋三友)가 그 만남을 완성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인물 고의후(高義厚)의 시에 보이는 내용이다.

◈ 국화를 읊다(詠菊)

有花無酒可堪嘆(유화무주가감탄)

꽃은 있는데 술이 없다면 탄식을 참아낼 수 있을까?

有酒無人亦奈何(유주무인역내하)

술은 있는데 사람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할까?

世事悠悠不須問(세사유유불수문)

세상일일랑 아득히 멀리 보내고 꼭 묻지 않아도 되리

看花對酒一立莫(간화대주일장가)

국화 바라보며 꽃을 마주한 채 한번 길게 노래 불러본다

 

이 시에서 꽃은 물론 국화이다. 시인은 국화는 있고 술이 없는 것을 탄식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지만, 대답은 물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이다. 그렇다면 국화와 꽃은 왜 같이 어우러져 있어야 하는 것일까 힌트는 시 안에 있다. 둘 다 세상사를 아득히 멀리 보내버리는(世事悠悠)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국화는, 서리에도 꼿꼿한 지조가 있다거나, 소박하고 친밀하다거나 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속세와 떨어져 사는 은자(隱者)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존재로서의 국화이다. 그러면 술은 무엇일까?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국화 꽃잎을 망우물(忘憂物)에 띄운다고 읊은 바가 있는데, 여기의 망우물(忘憂物)이 바로 그 술이다. 거리적으로 속세(俗世)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피어있는 국화에, 정신적으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술이 곁들여지면 속세의 번다한 일들로부터 멀어지는 효과가 배가(倍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술은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거나, 외로움을 달래거나, 좋은 일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시에서처럼 속세의 번다한 일들을 잊고자 마시는 경우도 있다. 여러 사람과 의례적으로 마시는 술이 있는가하면, 가까운 지인들과 조촐하게 즐기는 자리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혼자 마시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어떤 경우나 술이 작용하는 공간은 사람의 물질적 영역이 아닌, 정신적 영역이다. 특히 은자(隱者)의 경우, 속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단지 공간적 이동의 개념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정신적 이동의 개념이 수반되기 마련인데, 이 때 그 기재로 쓰이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은자(隱者)는 술을 마심으로써 공간적 이동 없이도 탈속의 정신 영역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국화로써 탈속의 장을 나타냈다면, 술로써 탈속의 정신 상태를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 탈속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은자(隱者)가 같이 하는 것으로 은자(隱者)의 환경은 완성된다. 은자(隱者)들의 만남에는 속세의 번잡한 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공간적 분신인 국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신적 매개물인 술을 마시면서 탈속의 노래를 하는 것으로 은자(隱者)의 의식을 마감한다. 은자(隱者)가 아니어도 좋다. 늦가을이 다 가기 전에 국화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말 통하는 사람과 술 한 잔 나누는 것으로 만추삼우(晩秋三友)를 즐길 수 있다면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