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월이 간다
다시 시월이 간다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2.10.30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초가을인가 싶더니 어느덧 晩秋(만추)다. 엊그제 추석을 지난 것 같은데, 이슬이 내리는가 싶더니 그새 무서리가 내릴 듯이 아침저녁 찬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메뚜기가 많아서 “잠시 잡았는데 한 봉지 였다”는 친구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 가시 같던 여름햇살이 추수를 앞둔 논에 금실을 뿌리듯이 쏟아지는데,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뜨겁다. 벌써 30년 전, 이런 가을날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 들녘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기 라도 하듯이 안개 속에서 논의 벼이삭이나 밭가의 잡곡이 밤잠을 잘 잤다는 듯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던, 가을은 무척이나 바빴다. 논밭의 곡물들이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준비가 다 되었다고, 빨리 좀 추수 해 달라고 애타게 조르는 시월의 끝자락이다. 돌아보면 추수를 하는 노동이 나를 신성하게 했다. 꿈꾸던 대학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대학과 연계된 꿈의 미래도 불투명해진다는 것, 무엇보다 젊다는 것이 당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나 역시 친구들처럼 대학 독서실에서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고. 미팅도 하고 싶고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나름의 능력도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 시절 시골엔 청춘이 머물 곳이 아니어서 다들 학교나 공장으로 공부하러 돈 벌러 나가고. 나 홀로 퇴색된 이미지의 시골구석에서 박혀 있다는 박탈감 때문에 청춘의 무게는 바닥이었다. 당시 앞서가는 농법으로 구비했던 트랙터나 오토바이가 내 아픈 청춘을 위로해 주었다. 바인더로 벼를 베는 일이나, 트랙터를 곡식을 싣는 일들이 오토바이의 바람 함께 폐 속에 가득한 불만의 찌꺼기를 걸러내 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일을 하면서 잡념을 잊는 습관은 신성한 의식처럼 나를 경건케 한다. 지금의 청춘들이 취직만 잘 하면 그만이듯이, 당시 아버지의 말씀대로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그만 이었고, 나는 영원한 취직인 결혼을 했고, 청춘이 꿈꾸던 것을 다 이루진 못했지만 하고 싶던 공부도 마저 마쳤고, 아이를 얻었으며 어머니가 되었다.  

가을이 되어 아파리들 수분이 줄어들면서 화려해지듯이 가을나이가 되어, 사람의 꿈도 마르고 물들어 웅숭깊고 초연해 지니. 이 계절이 절절이 외롭다고 느끼는 나는 자연인이다. 나뭇잎 수분이 마른 정도에 따라 바람소리가 다르듯, 사람 속에 견뎌온 꿈의 정도에 따라 목소리의 깊이가 다르다.

모든 살아있는 동.식물을 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사람이라면, 인간이란 원래 혼자만 잘 살도록 태어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가을이다. 그래서 누군가 외롭다면 보듬고 싶어지고, 아프다면 찾아보게 되고, 70억 가까운 지구인구 증에 그래도 한세상 함께 사는 귀중한 인연임을 되짚은 것이다. 식물들이 일 년의 꿈을 씨앗에 재우고 이파리를 떨어내듯이, 인류는 겨울잠 자는 동물들과 함께 피하지방을 축적하고 움직임이 느려지고 지난 계절보다 호홉이 깊어지는, 나도 세상의 자연과 별개가 아닌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나와 우리는 이 가을 햇볕에 습한 마음을 말려서 마음의 창고에 거두어들이고 정리해야 한다. 인류는 가을이 되어 수확한 것을 먹어치우고 존재를 이어가지만, 그 모든 곡물들을 그저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들 생명은 내 몸에서 새롭게 존재의 차원을 바꿔가며 공존하는 것이니, 나와 우리는 식물이고 동물이다. 모두가 우리의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가을은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마지막 까지 붉고 아프다. 햇살은 사방의 금보다 귀하고 나는 이 계절 깊은 외로움과 함께 울컥 눈물 한 방울 떨구게 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