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지랄의 미학과 가치
한국인들의 지랄의 미학과 가치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2.10.29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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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하던 지랄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일껏 잘하던 일도 더욱 잘하라고 떠받들어 주면 안 한다는 말인데 왜 그럴까 오늘은 집안 청소를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야지 마음먹고 빗자루를 들려하는데 엄마가 ‘얘야 청소해라’ 하면 그만 하기 싫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멍석은 지랄하는 자가 펴야 신명이 나는 법이다.

지랄의 사전적 의미는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한국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그런 지랄적인 DNA가 요즈음 역동적으로 발현되어 세계가 법석을 떨며 주목하고 있다.

오두방정 떠는 듯한 노래 말과 음악, 광란적인 춤과 도발적인 무대의상 등이 바로 지랄의 전형이다. 한국인들이 세계 속에 멍석을 깔고 이렇게 펼치는 그 지랄 놀음이 사물놀이로, K팝으로, 싸이의 말춤 등으로 진화되고 확장되어 5대양 6대주로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 근엄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하여 튀는 처신을 하지 못하게 했다. 군부 독재시절에는 개인 취향인 장발이나 나팔바지마저 단속의 대상이 되었고, 개인의 개성이나 독창성도 보편화 획일화 일반화라는 통치이념에 반하면 설 자리가 없었다. 만약 그 시절에 K팝 아이돌이나 싸이같은 뛰어난 뮤지션이 있었다면 환대는커녕 지랄하는 놈으로, 음악계의 이단아로 몰려 손가락질 받거나 사장되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지랄의 속성은 평범하지 않는데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고를 가진 자들이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고 시끄럽고 뒤틀리고 뚱딴지같아 보인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사를 들여다보면 그런 지랄 같은 생각과 행위들이 진보가 되고 쇄신이 되고 예술이 되는 단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지랄이 진보적 예술행위로,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으로 진화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덕목이 내재되어야 한다.

첫째 개성이 있어야 한다. 남의 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거나 표절이 아닌 자신의 색깔과 향을 갖는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의미가 있어야 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든 시대정신을 암시하든 행위 속에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셋째 미학이 있어야 한다. 웃음의 미학이든 존재의 미학이든 외재적이거나 내재적인 아름다음이 있어야 한다.

넷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기존의 틀을 깨는 아픔을 극복하는 치열성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감동이 있어야 한다. 여운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동의 메커니즘이 장착되어야 한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지랄 중에 큰 지랄이나 그 속에 필자가 전제한 개성· 의미· 미학· 열정· 감동이 잘 녹아 있기 때문에 뛰어난 대중예술로 문화상품으로 기능하며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수백 년 간 억눌려온 한국인들의 지랄하고픈 DNA가 마음껏 발현되어 대한민국이 21세기 르네상스의 진원지이며 만개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양한 생각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샘솟듯 생성하고 융복합되어 우리사회가 더욱 풍요로워 질 수 있으며, 지랄이 지랄로 끝나지 않고 문명진보의 아이콘이 되게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18대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거판에도 지랄 떠는 인간들이 있어야 선거에 관심과 묘미를 준다. 상대방에게 흠집과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적인 지랄이 아니라 위트와 촌설살인이 있는 그로 말미암아 가장 훌륭한 후보를 가리는데 기여하는 유익한 지랄가가 기다려진다.

친구야 지랄하자. 함께 멍석을 펴고 질펀하게 지랄 한 번 떨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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