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며
가을을 보내며
  • 신금철 <수필가>
  • 승인 2012.10.29 2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신금철 <수필가>

볼라벤을 비롯하여 네 차례에 걸친 태풍의 위력을 꿋꿋이 이겨낸 곡식들이 상처 낸 농부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듯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이 즈음이면 메뚜기가 파닥이는 논둑을 거닐던 단발머리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의 그리움에 젖는다.

싱싱한 배추들이 고갱이를 품으려고 넓게 손을 벌리고 있는 넉넉함에서 스러져져가는 가을 단풍의 슬픔을 떨쳐낼 수 있으며, 수확하는 농부들의 구부린 모습에서 삶의 의욕을 찾으려 애써본다. 그러나 땀 흘림 속에서 느끼는 농부들의 허탈함을 생각하면 내 일인 듯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

봄부터 씨 뿌리고 김매며 흘린 땀과 노력이 얼마나 그들을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있으며 희망을 가지고 다시 씨앗을 뿌릴 의욕을 줄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올 해 남편은 지인들과 어울려 고추 농사를 지었다. 농사라고까지는 말 할 수 없지만 밭 두 골에 고추모를 심고 혹여 시들까 걱정이 되어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막기 위해 고랑에 신문지를 깔아주며 정성을 기울였다.

고추는 정성을 알아주듯 무럭무럭 잘 자라 하얀 고추 꽃을 피우더니 마치 화초 열매를 맺듯 통통하게 살찌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였다.

조롱조롱 매달린 싱싱한 무 농약 고추를 송송 썰어 끓인 된장찌개는 일품이었다.

그토록 싱싱하게 잘 자라 기쁨을 안겨 주던 고춧대는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치고 난 뒤 부러지고 쓰러져 고추를 다 떨구고 주저 앉아버렸다. 너무도 안타까워 쓰러진 고춧대를 세워보았지만 한 번 쓰러진 고춧대는 깨나지 못하고 이내 말라버렸다. 농사일을 잘 하지 못하면서도 공을 들인 남편의 허탈해 하는 모습을 보는 나도 마음이 언짢았다.

겨우 고추밭 두 골을 잃고도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일 년 내내 힘들여 수확을 앞둔 그들의 생계를 이어줄 사과와 배가 다 떨어져 못 쓰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떠했으랴.

이렇듯 힘든 중에도 수확기 농촌에 도둑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연이은 태풍에 신음해 온 농심(農心)이 이제는 도둑들 때문에 가슴 졸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올해는 작황 부진으로 농산물 값이 급등한 터라 절도 피해 건수와 규모가 한층 커질 것으로 우려되지만 경찰 인력에도 한계가 있어 당장 뾰족한 해법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란다.

나도 밭둑에 심어 놓았던 호박 8개를 도둑맞았다. 풀숲에 가려져 발견을 못해 따먹지 못하여 늙어버린 큼직한 호박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란 잎 사이로 누런 몸을 드러내어 겨울에 호박죽을 쑤어먹겠다고 좋아했던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남이 농사지은 그 호박을 따던 손은 어떤 손이었을까 며칠 간 아른거렸지만 잊기로 했다.

농작물 피해자 상당수는 혼자 살면서 근근이 농사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노인들이라니 상심이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발 피땀 흘린 농작물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더 이상 농심을 울리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 가을 들녘이 풍요롭고 평화스럽지만은 않은 불안한 현실이 안타까워 가을을 보내는 마음이 더 허전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