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의 권력
지명의 권력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10.2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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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웬 공주가 이렇게 많아? 대전에서 당진 또는 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도로표지판에 공주가 정말 많다. 동공주, 서공주, 남공주, 공주 집안 같다. 공주를 통과하는 고속도로가 많아지면서 생긴 일이다. 한편으로는 공주님이 많아 즐겁다.

그러다보니 실수도 한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길을 잘못 들었더니 서천이 아닌 대전으로 가고 있었다. 서공주로 가야 하는데 동공주로 향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 건이 더 있었다. 공주님이 많아 실수한 것이 아니라, ‘동공주’가 사라지고 ‘서세종’으로 표지판이 바뀌어있었던 것이다. 공주님을 대신해 세종대왕께서 납신 것이다.

한편으로 임금님께 공주님을 빼앗긴 것 같아 서운했다. 공주님도 공주님 몫이 있는데, 임금님이 행여나 공주님을 못살게 구신 것 아닌가도 싶었다. 새로 생긴 왕국의 임금님이 우리나라 공주님의 정절을 빼앗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세종을 축하하면서도 공주의 지위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중심이 바뀌면서 동서도 바뀌었다. 무게중심이 동으로 이동하면서 동공주가 서세종으로 바뀌었다. 동서가 바뀌는 것은 보통일이 아닌데도 간단히 표지판을 바꿈으로써 방향이 뒤집혀지고 만 것이다.

지명은 권력이다.

오랫동안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을 못했던 것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집단의 이기심이 많이 작용했겠지만, 이제 청원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청주라는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청주의 고지도를 보면 청주도 들쭉날쭉 했었다. 얼마 전의 청주는 남북으로 길어 주성(舟城)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예전의 청주는 오히려 동서로 구획됐다. 마치 현재에 서쪽으로 발전해나가는 청주의 모양처럼 말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시는 ‘충칭’(重慶)시다. 말이 시지 우리나라 크기다. 그러면서 직할시(直轄市)의 자격을 얻었다. 예전에는 부산이 광역시가 아니고 직할시였던 것을 기억하자. 충칭이 시로 확대개편될 때, 쓰촨(泗川)성은 반발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 독립해 나가면 사천성이 뭐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당에서는 내륙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산샤댐 건설에 따른 발전계획에 따라, 충칭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충칭시에 할당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가 합해 이루어진 말이다. 청주가 도청수도지가 되면서 충주가 밀려났지만 지명에서는 아직 충주가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물길 중심의 체계에서 철도와 도로 중심의 체계로 교통의 중심이 바뀌면서 일어난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도 나주, 상주 그리고 경주는 도명에 남아 과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소를 거리에 풀어놓고 뜀박질을 하는 산 페르민 축제로 유명한 스페인 지역은 두 이름으로 불린다. 스페인어로는 팜플로나이지만 바스크어로는 이루나인 것이다. 역명으로는 크게 팜플로나로, 작게 이루나로 써있지만 그 동네에서 팔플로나라고 말했다가는 눈총 받는다.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지명은 민감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그 축제를 배경으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하자.

공주는 있지만 동공주는 사라졌다. 나의 신부, 동공주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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