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매화의 경염(競艶)
단풍과 매화의 경염(競艶)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0.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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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인간 세상에 여인의 미색을 평하는 많은 말들이 있어 왔다. 나라를 망쳐도 포기할 수 없는 미색이 경국(傾國)이요,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꽃마저도 부끄럽게 한다는 수화(羞花), 밝은 달을 숨게 만든다는 폐월(閉月), 날아가던 기러기를 떨어지게 만드는 낙안(落雁), 물고기가 숨고 마는 침어(沈魚)가 모두 절세의 미색을 일컫는 말들이다. 그러나 세상에 고운 것이 여인만은 아니다.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봄에 피는 꽃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로 미녀가 아닌 가을 단풍을 들고 있다.

◈ 산으로 떠나다(山行)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멀리 한산에 오르려는데 돌길 비스듬하고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에 그 사람 집이 있어라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 멈춰 앉은 것은 단풍 숲의 날 저뭄을 아껴서인데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잎이 이월에 피는 꽃보다 붉어라

한산(寒山)은 실제 산 이름일 수도 있고, 추운 산을 말할 수도 있지만 뭐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먼 곳에 있다는 것과 오르는 길이 비스듬한 좁은 돌길이어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이 찾는 주인공이 보통 세상의 속인(俗人)이 아닌, 도인(道人) 내지는 선인(仙人)임을 짐작케 한다. 그의 집은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깊은 산속으로, 흰 구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하고 범상치 않은 공간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여운으로 남겨둔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시인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주말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의외겠지만, 시인은 수레를 타고 산에 오르고 있다. 지금은 이상하지만, 옛날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시인이 수레를 멈춘 것은 길이 험하거나 수레가 망가져서가 아니다. 수레가 지나는 길가의 우거진 단풍나무 숲에 시선이 닿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붉은 저녁노을까지 더해지자, 시인은 더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가던 수레를 멈추고 주저앉아 저녁 단풍 구경에 나선다. 차가운 산(寒山)과 서리 맞은 잎(霜葉)이 암시하듯 철은 늦가을이라서 단풍은 이미 물들대로 물들었다. 여기에 저녁노을의 붉은 빛까지 더해졌으니 그 광경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시인이 무슨 일로 깊은 산속의 선인(仙人)을 찾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긴한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산속에서 날이 저물고 있음에도 서두르는 기색은 없고 도리어 수레를 멈추는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수레를 멈춘 건 일이 긴하지 않거나 마음이 여유로와서가 아니다. 바로 저녁노을 단풍을 아끼는(愛) 마음 때문이다.

해 저문데 수레를 멈추게 할 만큼 황홀한 단풍을 향해 시인은 의외로 간단하게 경탄을 표한다. 단풍잎을 꽃에 비유하는 것으로 최고의 찬사를 대신한 것이다. 물론 꽃은 보통 꽃이 아닌 이월화(二月花)이다. 이월화는 이월에 피는 꽃이라는 뜻으로, 긴 겨울 동안 보이지 않다가 나타난 반갑고 어여쁜 꽃이다. 보통은 매화를 말하고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깊은 산속에 은거하는 선인(仙人)을 찾아 깨우침을 얻고자 산행에 나섰지만, 도중에 만난 저녁노을과 단풍에 넋을 잃고 가던 길을 멈춘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대한 갈구마저도 잠시 잊게 한 단풍의 매력은 다름 아닌 붉음이고, 그것도 삼동(三冬)의 무채색에 지친 눈을 일순에 매료시킨 음력 2월의 꽃, 매화의 붉음보다도 더한 붉음이다. 이제 당(唐) 현종(玄宗)은 양귀비(楊�~�)에 대한 구애의 말을 바꾸어야 한다. 그대는 꽃을 부끄럽게 하는 미인에서 그대는 단풍을 부끄럽게 하는 미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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