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끄러미
물끄러미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10.15 2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시월이면 유난히 옛집이 그립다.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노을빛 감들이 등처럼 켜지던 뒤뜰. 오래된 감나무 두 그루 마주하고 선 풍경속엔 늘 적막감이 흘렀다. 하지만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으면 집짓던 무당거미가 툭 떨어지는 감나무 잎새에 맞아 출렁 그네를 타기도 하고 살금살금 오르내리며 감을 탐하던 청설모도 제가 흔든 나뭇가지 부비는 소리에 놀라 납작 몸을 숨기는 긴장감이 리듬처럼 흘렀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 절로 웃음이 나곤했다. 그렇게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대상을 바라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은 여유로워지고 풍경 속에 깃든 생명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도 그렇다. 나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도 오래 바라보면 순수한 관심이 생기고 아름답게 보인다. 찻집에서 혹은 터미널에서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찌 그리 제각각 어울리는 얼굴을 가졌는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경쾌하게 걷는 모습에 괜히 기분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누군가를 물끄러미 오래 바라보는 일.

얼마 전 집안 형님 생신이었는데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형제들이 모여 왁자지껄 겉도는 이야기들로 웃고 차 한잔 나누고 나면 의무를 다한 사람들처럼 각자 자기 길로 돌아선다. 그리고 잊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오래 마음을 나눌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상처럼 그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가끔은 쓸쓸하다.

일이 있어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일은 말로 하고 눈과 손은 스마트폰에 가 있다. 상대방이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마주보기보다 귓등으로 들으며 카톡으로 온 채팅문자에 답을 하느라 바쁘다. 보았으면 바로 답을 하는 것이 예의라니 어쩔 수 없다. 진동으로 해 놓아도 연신 몸을 떨어대는 휴대전화 때문에 대화의 맥이 끊어지기도 여러 번. 중요한 일도 있겠지만 참 불편하다. 게다가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고 짧게 하는 게임이 인기다보니, 아이도 어른도 잠시 틈나면 게임을 하느라 주변엔 관심이 없다. 가끔 새벽에도 전화기가 몸을 떤다. 한 번만 통화하거나 문자를 주고 받으면 휴대전화에 자동 친구추천이 되다보니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게임초대를 받는 일도 종종 있다.

요즘엔 소리를 끄는 일이 일과다. 친구들과 나누던 카톡도 밴드도 모두 조용히 시키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궁금하다. 스마트폰 사용 사 개월 만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것이다. 틈이 생기면 특별히 처리할 일도 없으면서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꺼내 이곳 저곳 기웃거린다. 중독이다.

오늘 아침 후배와 산을 오르며 전화를 두고 나오니 몸이 가볍다. 무엇보다 대화가 끊이지 않아서 좋다. 딱따구리가 경쾌하게 나무를 쪼아대는 모습도 오래 눈에 담고, 민낯으로 마주보고 그 마음자리를 가늠하며 웃을 수 있어 참 좋았다.

물끄러미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아무생각 없이 바라보는 일. 그것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를 진솔하게 만드는지 한참을 잊고 살았다. 시월이면 밤새 고여 있던 안개가 감잎을 타고 투둑 툭 툭 흘러내리며 리듬을 만들어내던 옛집.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간들이 그립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