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옷을 개키며
철지난 옷을 개키며
  •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 승인 2012.09.2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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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열매 맺음의 달도 훌쩍 지나고 하늘을 연 달이 달려와 감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는 가을햇볕을 마중한다.

치근대던 가을비가 그친 후 들판이나 마당에 내려앉는 햇살이 청명하기 그지없는 주말이다. 여름 내내 층계 아래 다락방 속에 갇혀서 눅눅해진 추동복 옷가지들을 꺼내어 거실 가득 늘어놓고 옷 정리를 하였다.

곰팡이도 살펴보고 단추들도 점검하고 훌훌 털어서 마당 빨랫줄과 나뭇가지위에 깃발처럼 펴 널었다.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쏜살같이 날아와 바지랑대 끝에서 짝을 기다리고, 감나무 단풍잎이 춤사위를 벌이며 추락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가을 풍경이다.

아침마다 개성미 넘치는 저마다의 미소로 마음을 붙잡으며 사람을 일으키고 텃밭을 깨워주던 꽃밭 가족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도 적막해지면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빛바랜 사진처럼 쓸쓸히 미소 짓는다. 기울어져 가는 태양의 고도를 따라서 바람 부는 대로 몸을 기울이면서 열정의 추억을 식히고 있다. 고요한 내면을 휩쓸면서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지나가는 폭풍우의 혼을 따라서 제 영혼들을 모두 실어 보내는지 사뭇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회한의 재들을 허옇게 뿌리며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한줄기 가을바람에 이별의 왈츠를 추어대며 한 줌의 검불때기로 사라져가는 소멸의 섭리를 가르쳐주는 계절이다. 머지않아 제 씨앗들을 대책도 없이 발아래 우수수 뿌려놓겠지….

나무위로 두엄위로 울타리 너머로 뭉글뭉글 활개를 치며 뻗어가던 호박 넝쿨도 이젠 왕성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누렇게 바래가는 커다란 잎사귀 속에 숨겨둔 보물단지를 보란 듯이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어주겠지….

거실로 돌아와 밀쳐놓았던 철지난 여름옷들을 하나하나 개켜 추동복이 들어있던 박스 안에 도로 집어넣는다. 오랜만에 차가운 방바닥에 기름보일러도 돌려본다. 옛날 어머니께서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면 뼈마디마다 쑤시고 아프시다며 으레히 아궁이에 삭정이를 지피시며 옷 정리를 하시곤 하였다.

가을이 오는 어느 날 내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매만지시고 개키시면서 '너도 벌써 가을 나이로구나….' 애처로워하시던 목소리가 파아란 하늘가를 맴돈다.

해마다 새순이 돋을 무렵에는 겨울 두꺼운 외투들을 개키면서 오는 봄에 소망을 걸어보았고, 녹음이 짙어지면서 긴소매가 답답해지면 잠사잠깐 걸쳤던 봄옷들이 다시 그 자리에 정리되곤 하였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한기를 느끼면 춘추복을 다시 꺼내고 그 자리에 여름옷을 넣는다. 이 옷들도 잠시잠깐 걸쳤다 벗었다를 되풀이하면 낙엽 구르던 들길에 하얀 눈이 쌓이고, 머지않아 다시금 겨울외투로 바꿔 입어야겠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옷정리 하기만도 버거운 시간이다. 몇 일전 신문에서 읽은 한시 귀절 不滿百千歲憂의 삶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채 백년도 살지 못하고 떠날 인생들이 한 천년은 살아 볼 양으로 날마다 전전긍긍하면서 가슴속에 한들을 겹겹이 쌓아놓고 풀어내지 못한 채 만족도가 제로인 채로 살고 있다는 뜻일 게다.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 없는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시어일 게다. 어쩌면 멀찌감치 잡아도 백년도 못살고 떠나는 우리네 인생인데, 그 짧은 여정속에 무슨 시름과 고통과 걱정을 그리도 많이 싸안고 다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다.

가족별로 계절별로 다 채운 옷 박스들을 다시 층계 아래 다락방으로 밀어 넣으며 내년 이맘때 다시 보자고 눈인사도 보내지만, 오늘 한나절을 호탕하게 웃으며 살지 못하는 부족함을 절감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하여 날마다 낮은 곳을 향하여 물 흐르듯이 살고 있는 우리의 여정, 욕심으로 빗나가는 목표 도달에만 눈이 멀지 않고 하루하루의 과정을 사랑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같은 삶이었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황금들판을 창조하시는 여호와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는 이 계절에, 세상과 다투지 않고 주변에 이로움을 더하라는 不爭의 이론을 배운다.

파릇파릇 새순 돋아나는 봄날이 돌아와 다시금 철지난 옷들을 갈무리 할 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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